부모의 기대에 짓눌린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가, 부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으려고 독기를 품은 날카로운 얼굴이 된다. 배우 정수빈이 같은 시기에 공개한 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와 U+모바일tv 시리즈 ‘선의의 경쟁’을 오가며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정수빈은 지난 2019년 영화 ‘주근깨’로 데뷔한 1998년생 신예다. 2020년 JTBC 드라마 ‘라이브온’을 시작으로 2021년 OCN ‘다크홀’, 2022년 디즈니+ ‘너와 나의 경찰수업’와 ‘3인칭 복수’와 넷플릭스 ‘소년심판’ 등에 조단역으로 꾸준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러다가 2022년 방송한 SBS 드라마 ‘트롤리’에서 김수빈 역으로 첫 주연을 맡아 활약했고, 2023년 SBS 연기대상 신인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았다.
지난해에는 MBC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서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줬다. 정수빈이 연기한 봉난실은 종남서림의 단골손님이자 추리소설 마니아로 여경을 꿈꾸는 싹싹하고 당차고 강단 있는 성격의 여고생이다. 끝내 여경의 꿈을 이룬 난실이 경찰 박영한(이제훈), 김상순(이동휘), 조경환(최우성), 서호정(윤현수)와 완벽한 팀워크를 이뤄가는 과정은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안기며 사랑 받았다.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예민한 소녀의 심리 표현
차곡차곡 쌓은 정수빈의 실력은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와 ‘선의의 경쟁’으로 이어진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감독 김혜영·제작 투맨필름)는 정수빈의 상업영화 데뷔작으로 4년 전 촬영을 마쳤다. 정수빈이 연기한 고등학생 나리는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무용단의 센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 그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고슴도치처럼 날을 바짝 세운다. 엄마를 잃고 갈곳이 없는 인영(이레)이 소속된 서울국제예술단에서 함께 한국무용을 연습하지만, 삶을 대하는 가치관과 태도가 달라 자꾸만 부딪힌다.
나리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엄마의 꿈과 바람을 대신 이뤄줘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벗어날 수 없는 강압적인 상황들은 불안감이 되어 언제 폭발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예민함을 갖게 만든다. 정수빈은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 10대가 갖는 보편적인 감정은 물론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예민지는 소녀의 심리를 유연하게 표현한다.
인영에게 품은 질투를 애써 감추기 위해서 나리가 일부러 비아냥거리거나 퉁명스럽게 말하는 장면들에서도 정수빈의 진가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처음에 나리는 인영이 유일한 보호자였던 엄마를 잃고 무료로 무용단에 다니는 상황에 또래 단원들이 불만을 토해내도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그러나 60주년 공연 오디션에서 인영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자, 참아왔던 감정을 토해낸다. 이를 계기로 나리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더없이 해맑은 인영에게 느꼈던 일종의 자격지심을 드러내는데, 그 상황에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고 공감을 이끌어낸다.
김혜영 감독은 “나리는 웃을 때는 아이처럼 해맑지만 현실에서는 압박감으로 인해 그늘이 있는 양면성을 모두 가진 배우를 생각했다”며 “오디션으로 만난 정수빈의 연기와 움직임이 나리를 잘 표현해줄 것 같았다”고 밝혔다. 한국무용이 소재인 만큼 정수빈은 촬영을 시작하기 전 두달 가량 관련 동작을 익히는 연습을 거쳤다. “나리처럼 춤을 잘 추고 싶어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몸이 주인공들의 삶을 담은 것 같았다”고 촬영 과정을 돌이킨 정수빈은 영화에서 단체 군무부터, 개인 안무까지 능숙하게 소화한다.
● ‘선의의 경쟁’ 혼자 남은 10대의 생존법
지난달 14일 공개된 ‘선의의 경쟁'(극본 김태희, 민예지·연출 김태희)에서 정수빈은 독기를 품은 소녀 우슬기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부모의 기대와 보호로 인해 제대로 날갯짓을 하지 못했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의 나리와 달리, 슬기는 어린 시절 미아가 돼 보육원에서 자란 뒤 부모의 그림자를 찾으려고 한다. 수능출제위원이자 교사였던 아버지의 의문사 소식을 듣고 진실을 파헤치려고 문제의 고등학교로 향한다.
정수빈은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맞춰 태도를 바꾸는 슬기의 변화를 단계적으로 표현한다. 슬기는 보육원에서 존재감 없이 자랐고, 중학생 때는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공부를 잘하면 지독한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교 1등으로 성적을 끌어올린다. 그러다 전학을 간 채화여고에서 공부도 외모도 재력도,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유제이(이혜리)를 만나면서 그에게 조금씩 말려든다.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제이에게 슬기는 경계심을 갖고 멀리하지만, 결국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에 제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J메디컬센터와 얽힌 의료소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슬기는 내어줄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면서 거친 세상에서 혼자만의 생존법을 터득해 간다.
“각자의 비밀을 숨긴, 약간 어딘가 미쳐있는 소녀들이 나와서 핏빛 경쟁을 하고 상황에 따라 친구가 되고 또 적이 되는 이야기”라는 김태희 PD의 설명처럼 정수빈이 연기하는 슬기는 필요에 따라 제이와의 관계를 바꾼다. 특히 제이가 자신의 모든 개인 정보와 과거사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건강검진에서 약점을 잡힐 수 없다는 판단으로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 장면에서 정수빈의 연기는 단연 돋보였다. 16부작인 ‘선의의 경쟁’은 6일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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