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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어엿한 K장녀로서 예부터 무뚝뚝한 편이었으며, 가족 간의 갈등에는 중재자 역할을 하고 내 힘든 일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는 성격을 타고났다. 겉으로는 꽤 외향적인 편이라 온종일 밖을 쏘다니고 집에는 잠만 자러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이후부터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기에 밥 한번 먹자는 친구들의 인사는 ‘지우 한국에 있긴 한 거지?’로 시작됐다(보통 그런 물음이 올 때마다 한국에 없었지만). 새로운 곳에 가는 걸 좋아하고, 외로움은 잘 타지 않아 이번 여정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지금 나는 미국에 있다. 교환학생 비용을 전액 지원해 주는 미국 국무부 프로그램에 무턱대고 신청했는데 덜컥 합격해 버렸기 때문이다. 전액 지원이라는 말은 달콤했지만,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미국의 마을에 무작위로 배정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처음 들어본 인디애나 주의 먼시라는 작은 마을로 떨어졌다. 백인이 80%이고 동양인은 2%뿐인 곳. 휠체어를 탄 작은 동양인 여자는 도대체 어떤 소수자로 여겨질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소수여도 되는 건가? 엄청 희귀한 도전 과제를 받은 것 같았다. 내 무던한 성격으로 순조롭게 적응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도착하고 몇 주간은 불안했다.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특히 교통의 요충지인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교는 미국에서 톱 10위에 들 정도로 장애 학생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캠퍼스지만, 캠퍼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야말로 정글, 아니 악몽이 펼쳐졌다. 보도블록은 깨져 있기 일쑤고, 그마저도 캠퍼스를 조금만 벗어나면 끊겨버려 4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생겼다. 덕분에 나는 근처 마트에 가보려다 하얗게 질린 이후 캠퍼스 밖을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설날이 다가오면서 향수병이 찾아왔다. 가족과 한국에 있는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동생과 마라탕을 시키곤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가 불쑥 말했다. “나 며칠 뒤면 다시 미국으로 가야 해. 너무 가기 싫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코를 훌쩍이면서 부스스 일어나 생각했다. 무언가 해봐야 한다. ‘두 번째 집 만들기’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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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내가 한 일은 루틴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밤늦게 자던 내가 여기선 시차 덕분에 아침형 인간이 돼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거나 과제로 주어진 영어 글을 읽었다. 가끔 유산소 공복 운동도 했다. 그러고 나면 정확히 약속한 시각에 내 일상을 도와주는 보조인이 방으로 찾아온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 수업이 있든 없든 곧바로 밖으로 나선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학교로 향하고, 없는 날에는 도서관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한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할 것이 없어 매우 당혹해하는 다른 국제 학생과 다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프리랜서로서 밀린 일이 많았다. 그렇게 6시 30분까지 할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운동한다. 계획 지키기에는 전혀 소질이 없지만,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예측 가능한 흐름을 만든 것이다. 두 번째는 최애 장소 만들기. 2주 정도 지났을 때, 기숙사 근처의 도서관에 카페가 있다는 걸 알았다. 커피는 매우 저렴했고, 커스텀이 가능했다. 늘 밝게 인사해 주는 중년 여성 직원이 좋기도 했다. 커피를 들고 도서관 3층에 올라가면 구석에 벽 한 면이 통창인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영상 편집을 하는 게 좋았다. 최애 학식도 개발했다. 이곳 특성상 신선한 채소나 쌀밥을 먹기 힘든데, 기숙사 근처 식당에 있는 포케집을 발견한 것이다. 추가 금액 없이 원하는 토핑을 할 수 있어 만족스럽게 한 끼가 가능하다. 이제는 날 알아보는 직원에게 다가가 말한다. “연어 포케 주세요. 양상추, 양파, 아보카도, 해초, 튀김가루 넣어주시고요. 스파이시 마요랑 스리라차 엄청 많이 주세요.” 세 번째는 취미 찾기다. 이 먼 타지까지 와서 한다는 취미가 한국에 있는 Y와 게임하기라니 좀 우습지만,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이 시간이 내겐 한국과 연결되는 가장 강력하고 긴 순간이다. Y의 시간으로 오후 9시부터 12시까지, 내 시간으로 아침 7시부터 10시까지 함께 게임을 한다. 중학생 때부터 해오던 게임이라 편안함을 준다. 새로움을 찾아 미국으로 왔으면서, 그것도 모자라 도파민을 준다는 헛소리를 하며 지역 랜덤 배정 프로그램에 지원한 주제에 이렇게 익숙한 것을 찾아 헤매는 나를 보는 것이 좀 우습다. 하지만 언어도, 날씨도, 지형도, 사람도 모두 다른 이곳을 내 집으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예측할 수 있는 하루 만들기, 좋아하는 곳에 가서 좋아하는 일 하기. 때때로 오랜 친구와 시간 보내기. 이렇게 하다 보면 이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내 나라가 그리울 땐 아예 한국의 것을 마구 즐겨보는 것도 방법이다. 내게는 지난 설날이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명절이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공허했다. 국제문화교류 행사 때 입으려고 가져온 개량 한복을 꺼내 입고 등교했다. 각종 스타일이 차고 넘치는 캠퍼스에서도 나 같은 옷을 입은 여자애는 아무도 없었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저녁에는 한 번도 끓여보지 않은 떡국을 만들었다. 종교적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치킨 불고기 만두를 사고, 코인 사골을 끓여 육수를 내고, 쇠고기도 달달 볶고 만두와 떡을 듬뿍 넣어 한 솥을 끓였다. 너무 많이 끓인 탓에 국물은 하나도 없는 스튜 같은 모양새였지만 친구들은 하나같이 맛있게 먹어주었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나눠 먹는 음식. 피부색도, 나이도, 사는 지역도 다르지만 그때만큼은 기숙사 라운지의 작은 식탁이 내 설날이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한 달이 지나갔다. 그래서 이곳이 제법 집 같다.
김지우
‘구르님’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든다. 뇌병변장애인의 삶을 담은 〈굴러라 구르님〉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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