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힘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경쟁적인 학교 분위기에 맞춰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장난기 많고 까불거리던 내가 짜증이 많고 거칠어졌다. 내가 왜 이렇게 별로인 인간이 됐을까 질문하다 청소년 인권 운동을 시작했다. 1990년대생이라면 익숙할 만한 두발 자유, 체벌 금지를 포함해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고 경쟁적인 입시제도를 비판하는 활동이었다.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인지 조목조목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이 자라고 나니 내가 다니는 학교부터 바꾸고 싶었다.
바꾸려면 힘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바꾸고 싶은 게 생겨서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야 될 것 같다며 친구들에게 출마 선언을 하고 다녔다. 당선이 되고 나니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책상에 다시 앉아 뭔가를 계속 만들었다. 반장들이 다 모여서 하는 회의를 어떻게 바꿔볼까, 학칙을 바꾸려면 어떤 논리와 근거를 만들어서 명분과 여론을 쌓을까, 이걸 하고 싶으면 누구를 찾아가 설득해야 하나. 이런 걸 하다 밤을 꼴딱 새우고 학교에 가서 오전 내내 엎드려 자다가 점심시간 즈음 깨어나 교무실에 찾아가고 학생회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 사람을 설득하고, 신뢰를 얻어 힘을 빌려 받고, 그 힘으로 작고 큰 변화를 만드는 경험은 엄청났다. 더 나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면 시스템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것, 그 시스템과 문화를 효과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그에 맞는 책임과 권한이 필요하다는 건 고등학교 때 배운 가장 귀한 경험이다.
대학까지는 제법 그 경험이 이어졌는데, 직장생활을 시작하니 제한적이었다. 뭔가 바꾸고 싶다면 말이 되게끔 만들어서 상사나 대표부터 설득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어디까지 힘을 가질 수 있을지도 막연했다. 여성 대표나 여성 리더를 볼 기회가 너무 적었다. 드라마든 현실이든 여성이 힘을 가지고 싶어 하면 드세고 독하고 욕심 많다는 평가를 듣고, 힘을 갖고 싶다는 건 위험하고 지저분해서 감당하기도 어려울 거란 우려가 따랐다.
그러던 내가 다시 힘을 생각하게 된 건 2020년이었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면서 광역자치단체장 성범죄가 알려졌다. 그들의 힘을 빼앗아야 했다. 연이은 N번방 사건에 대한 정치권의 대처를 보면 국민청원에 요구해서 해결해 달라고 하는 일에 애가 탔다. 왜 요구만 해야 하지? 힘이 있으면 더 빨리,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데. 요구하던 에너지를 힘을 갖기 위한 에너지로 쓴다면 더 빨리, 더 큰 힘을 모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이 등장하고, 여성 정치인이 더 큰 힘에 닿을 수 있을 텐데. 내 또래들이 더 많은 힘을 가지길 바랐다. 다양한 의사결정권자가 성장하는 시스템을 만들게 된 이유도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다양한 사람들이 요구를 넘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요즘 다시 힘을 생각한다. 2030 여성이 광장 문화를 바꾸고 연대의 확장을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그렇게 됐다. 참여의 확장과 권력의 확대는 완전히 같지 않다. 참여가 커질수록 시민으로서 영향력이 커지지만,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건 아니다. 광장에 모인 목소리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다시 정치인에게 요구하게 된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힘을 얻어 직접 변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지, 어떤 논리와 근거로 명분과 여론을 쌓을지, 이걸 하고 싶으면 누구를 찾아가 설득해야 하는지. 직접 힘을 쓰는 것에 익숙해지면 비로소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일단 힘을 갖고 싶어 해야 한다. 누구에게 힘을 몰아주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 시작이다. 다양한 응원봉을 든 ‘개인들’이 어떤 사회를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집단’이 되고 나면 정치적 의사결정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도 있다. 나아가 권력을 가진 선출직 정치인이나 임명직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2025년. 또다시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한 우리는 알게 됐다.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일을 기성 정치인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누려온 시스템과 문화는 오래전에 낡았다. 그들의 명분이 돼주고 싶지는 않다. 이미 기존의 낡은 방식과는 다른 2030 세대의 시스템과 문화를 광장에서 보여주지 않았나. 이제 힘만 있으면 ‘딱’이다! 다르게 바꿀 수 있다. 응원봉을 쥔 손으로 우리는 다른 힘을 쥐자. 그게 무엇이든.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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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치인 에이전시 ‘뉴웨이즈’ 대표. 공동 저서 〈젊치인을 키우고 있습니다〉를 펴냈다.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그냥 재밌어서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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