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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기스트로 사는 법_엘르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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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 신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의 사생활 99〉 시리즈 중 2010년 ‘이랑 편’(글 이랑, 만화 실키)은 음악가 이랑이 오래전 파리에 간 에피소드에서 시작한다. 젊고 돈이 없던 그는 어느 날 폐장 중인 시장에서 상인들이 버린 과일과 채소를 주워 가는 사람들을 보고 따라 줍는다. 그 후 과일을 주우러 나가는 일은 주말마다 이벤트로 자리 잡는데, 팔 때 사지 않고 공짜로 주워 간다고 상인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열하게 박스를 향해 내달리는 사람들에게 이랑은 ‘줍기스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나는 그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물자가 넘쳐나다 못해 버려져 썩는 세상에서 그것을 주워 살아가는 데 보태는 일은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일 뿐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요즘 내가 외출할 때 입는 점퍼는 사이즈가 너무 크다며 친구가 준 것이다. 양털처럼 북슬북슬한 안감과 검은색 겉감, 목을 덮어주는 칼라가 달려 퍽 따뜻하다. 그동안 겨울용 겉옷은 롱 패딩과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코트뿐이었는데, 이 점퍼는 거추장스럽지 않아서 집 앞에 훌쩍 나갈 때 입기 좋다. 통이 넓어 내복과 같이 입을 수 있는 면바지 두 벌도 친구에게 얻었다. 나보다 키가 작은 친구가 줄였던 아랫단을 다시 냈더니 눌린 자국이 선명하지만, 몇 번 세탁하면 없어질 거라는 수선집 아주머니 말씀을 믿고 일단 입어서 지우는 중이다. 초겨울엔 조문 갈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친구가 버리려던 걸 얻어 입은 검정 블라우스 덕을 톡톡히 봤다. 친구가 조금 부담스럽다고 말한 옷감의 광택이 나에겐 나름 멋져 보였다.

패션에 별다른 취향이나 기준이 없다는 건 ‘얻기스트’로서 내가 가진 자질일 것이다.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이상 옷 물려 입기는 운명 같았고, 의복비만큼은 극단적으로 아꼈던 엄마로 인해 나는 착실한 패션 테러리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옷을 얻어 입는 행위에는 절약의 기쁨뿐 아니라 자신감까지 더해졌다. 옷에 관한 내 안목은 믿을 수 없어도, 나보단 패션에 관심 많은 친구의 안목에 기대면 당당해질 수 있다. 지난 2년간 대학원에 다니며 서서히 눈치챈 것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상의를 입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넓은 캠퍼스에서 오직 나만 언니에게 얻은 치렁치렁한 검정 바람막이를 죽음의 사신처럼 걸치고 다니던 어느 가을날, 친구가 단톡방에 산뜻한 회색과 하늘색 크롭트 후디드 점퍼 사진을 올리며 혹시 입을 사람 있냐고 물었다. 나는 재빠르게 손들었다. 사실 나 말고 아무도 들지 않았다. 며칠 뒤,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새 옷을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도 관심 없었겠지만, 혼자 열 살은 어려진 기분으로 신나게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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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처음 캐나다로 갔을 때 한국인 사이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혔던 건 당시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던 ‘자라(Zara)’ 매장이었다. 엄청나게 다채로운 옷들,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건 ‘패스트 패션’이라는 개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좋은 옷을 잠깐 입고 버릴 수 있지? 한번 사면 당연히 평생 입는 거 아닌가? 내가 자라에서 처음 산 옷은 에스닉 무늬가 들어간 짙은 녹색 원단에 넓은 소매가 달린 튜닉 스타일의 블라우스였다. 지금 생각하면 18세기로 타임 슬립한 영국 드라마 여주인공이나 입을 법한 디자인이었지만, 나는 이 옷을 마르고 닳도록 입고 수선해서 계속 입다가 지난해에 헌 옷 수거함으로 보냈다. 헌 옷 수거함에 들어간 옷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음 주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나 타이 등 저개발 국가로 흘러가 쓰레기 산을 이룬 다음 소각되며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킨다는 보도와 마주하기 전의 일이다.

나 역시 새 옷을 좋아한다. 나이 먹을수록 새 옷을 입어야 사람이 추레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신경 쓰이고, 모처럼 새 옷을 사 입은 날엔 ‘이 맛에 돈을 버는구나’ 싶을 만큼 기분이 들뜬다. 다만 매일 등교나 출근할 필요가 없고, 패션이라는 세계를 미궁처럼 두려워하며, 결정적으로 돈이 별로 없어서 약간 금욕적이고 본의 아니게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버린 옷들이 지구 저편에서 거대한 언덕을 이루고 풀 대신 썩은 옷을 뜯는 소들과 독성 물질로 표백된 옷 더미 위에서 노는 아기의 사진을 떠올리면 옷을 사는 즐거움보다 얻어 입고, 아껴 입고, 나눠 입는 재미에 관해 좀 더 말하고 싶어진다.

내게는 사회 초년 시절에 구입한 비둘기색 재킷이 있다. 백화점 행사 매대에서 50% 세일해서 구입한 재킷을 애지중지 입었다. 시간이 흘러 유행에 뒤떨어진 것 같았지만, 재킷은 새로 사려면 큰돈이 드는 데다 뭘 사야 할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17년이 흘렀다. 이제는 그냥 유행은 반복된다는 말을 믿고 내 재킷이 트렌드가 될 순간만 기다리며 매년 나만 아는 기록을 경신하는 중이다. 물론 그날이 오더라도 가슴 포켓에 달린 행커치프나 뒤판의 장식 끈이 구닥다리처럼 보이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얻기스트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다. 지구상에 나로 인해 만들어질 폐기물 산은 가능하면 낮을수록 좋을 테니까.

엘르
엘르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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