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턱없이 부족한 예산과 인력 속에서 그들은 어쩌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투를 벌인다. 기피하는 과이자 병원 내에서 환자를 살릴수록 매년 적자가 쌓이는 외상외과 그것도 중증외상팀의 씁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명감으로 버티고 버텨내어 환자를 살린다고 하더라도, 부조리한 시스템은 이들의 존속에 어려움을 만든다.
이 상황을 타파할 히어로 같은 의사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증외상센터'(극본 최태강·연출 이도윤)의 백강혁(주지훈)의 존재는 판타지이지만,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한국대학교 중증외상팀의 교수로 부임한 백강혁은 괴물 같은 체력과 초인적이고 천재적인 실력으로 중무장하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꼬집는다.
북한산에서 추락한 환자가 발생하자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가 레펠을 타고 절벽 위로 뛰어내리거나, 뇌출혈을 일으킨 환자를 살리려 헬기 안에서 머리를 개봉하는 수술을 하는 과감함은 ‘의사가 맞는지’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너 뭐하는 OO야”, “이것도 못 하냐”라며 다소 시니컬한 말투와 거친 언행, 거침없는 태도를 보이지만 중증외상팀을 이끄는 참된 리더이기도 하다. 햇병아리 같은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는 ‘호랑이 선생님’ 같은 면모도 있지만, 마음이 다치지 않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실력 없고 변명하는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누구보다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을 지닌 참의사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한산이가 작가(본명 이낙준)가 연재한 웹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홍비치라 작가가 그린 웹툰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를 기반으로 만든 ‘중증외상센터’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적인 요소로 통쾌함을 안긴다. 하지만 “이 퍽퍽하고 꺼끌꺼끌한 길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걸어가기에는 너무 되다”는 백강혁의 말처럼, 단순히 ‘중증외상센터’는 천재적인 의사 한 명의 영웅적인 서사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병원의 외압과 중상모략에도 꿋꿋이 중증외상팀을 이끌어갈 수 있는 이유는 ‘팀’으로서 각자의 힘을 보태어 버텨내기 때문일 것이다.
● 중증외상센터라는 공간과 시스템을 꼬집다
“제가 한국대 병원에 온 이유는 중증외상팀 셔터 내리러 왔습니다” 교수 임명식 날, 백강혁은 중증외상팀을 중증외상센터로 만들겠다고 당돌한 포부를 내비친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거칠게 숨을 내뱉는 중증외상팀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환부를 파악해 제대로 된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다. “이거 뭐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라는 백강혁의 촌철살인 같은 대사는 중증외상팀을 지탱하는 시스템 자체가 견고하지 않고 위태롭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항문외과 전임의인 양재원(추영우)과 백강혁의 우연한 만남을 되짚어 보면,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외과의 항문 전공이었던 양재원이 백강혁을 만난 이유는 응급의학과와 함께 흉부외과와 일반외과가 함께 응급실 당직을 돌아가면서 선 것에서 비롯됐다. 때문에 양재원은 자상을 입고 들어온 환자의 몸 안에 멍이 든 상태를 빠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천자(속이 빈 가는 침을 몸속에 찔러 넣어 체액을 뽑아내는 일)도 머뭇거린다. 인력이 부족해 응급의학과가 아님에도 당직을 돌면서 제대로 된 경험과 실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로 환자를 맞아야 하는 현실이 양재원의 첫 등장에서 묘사된다.
하물며 1분 1초마다 사선을 넘나드는 중증외상팀은 환자를 살리면 살릴수록 ‘죄인’ 취급을 받는 아이러니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예산과 전문 인력도 부족한 것도 서러운 처지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입장이다. 장례식장, 주차장, 식당이 앞다퉈 높은 순위권에서 흑자를 낸다면, 외상외과는 백강혁이 부임한지 무려 한 달만에 적자 4억원을 넘게 기록하기 때문이다.
골든타임을 지키기 위해서는 헬기를 타야 하는데, 제대로 된 헬기장이 없고 119구조단에 요청해서 타더라도 굉장히 많은 비용을 수반한다. 백강혁이 못마땅했던 기획조정실장(병원의 예산을 담당) 홍재훈(김원해)은 소방청장과 공모해 승인을 받고 서류를 제출해야만 헬기를 탈 수 있도록 바꾼다. 지금 당장, 헬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런 절차를 밟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리 천재적인 의사 백강혁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상황에서 환자를 살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헬기 대신 구급차를 타고 환자가 있는 곳까지 출동하지만, 골든타임을 놓친 환자는 뇌사 판정을 받게 된다.
8부작 시리즈인 ‘중증외상센터’는 히어로물 안에 날카로운 현실의 칼날을 숨겨놓은 풍자극에 가깝다. 복강 내 출혈, 소월대교 60중 추돌사건, 남수단 이현종 대위 수술 등의 에피소드에서 백강혁의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을 혀를 내두르게 만들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암울한 현실을 비추고 있다.
특히 소월대교 60중 추돌사고에서 백강혁은 빠르게 환자를 분류하고, 세 개의 수술방을 바삐 오가면서 수술을 집도한다. 본인이 집도의로 있는 메인 수술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백강혁의 모습은 그만큼 중증외상팀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중증외상에 대해선 항문외과 과장 한유림(윤경호)의 딸 한지영이 교통사고로 실려와 심장 파열된 상황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증외상팀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부정하던 한유림이 보호자로서 백강혁을 의지하는 모습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도윤 감독은 원작 웹소설과 웹툰을 관통하는 주제인 불균형한 시스템과 중증외상팀의 존속을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영화 감독 출신인 이도윤 감독은 8부작 시리즈에 이야기의 감정선을 꾹꾹 눌러 담아 빛나는 알맹이로 만든다. 외전을 포함해 웹소설 총 1120화, 웹툰 149화 분량을 8부작 안에 묵직하게 담아낸다.
1회의 오프닝에서부터 백강혁은 폭격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설정이다. 가방에 들어있는 혈액과 의료도구를 전달하기 위해 다친 몸을 이끌고 나아가는 백강혁의 영웅적인 모습을 오프닝에 배치하면서 중증외상센터의 무거운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 단순한 히어로물 아닌 ‘어벤져스’ 서사
우리에게 필요한 참된 리더이자 선배는 누구인지에 대해 ‘중증외상센터’는 백강혁을 통해 이야기한다. 1회에서부터 백강혁은 중증외상팀에 합류해 함께 이끌어나갈 팀원들을 찾는데, 이는 중증외상팀이 한 개인이 아닌 하나의 팀으로서 굴러간다는 의미다.
“외상센터는 하나의 팀입니다. 저 혼자였다면 불가능했던 일도 서로가 있기에 가능했다”는 백강혁의 대사는 중증외상팀을 재건하기 위해선 여러 개의 주춧돌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히어로물이지만, 마블의 히어로 시리즈 ‘어벤져스’ 같은 서사를 취한다. 물론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헐크, 블랙 위도우처럼 중증외상팀의 팀원들이 모두 백강혁처럼 높은 능력을 지니지 않았지만 함께 할 때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겉으론 안하무인에 무례한 듯 보이는 백강혁은 알고 보면 정이 많은 따뜻한 선배다. 후배들을 향한 공격을 방패막처럼 막아주고, 위험에 혼자 노출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스파트라 식의 교육을 강조해 따라기가 버겁지만, 한 단계 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끌어준다. 주지훈은 원작에서 표현된 돈, 외모, 실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캐릭터를 어색하지 않게 녹여낸다. 판타지 장르에서 자칫하면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울 법한 대사나 상황이 반복되지만 백강혁이 환자를 위해서 고군분투한다는 중추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중증외상팀을 이끈다.
양재원은 수입도 괜찮고 개원하기에 전망도 좋은 항문외과 펠로우지만, 백강혁의 제안으로 중증외상팀에 합류한다. 하루도 편치 않은 고된 생활과 끝없는 잔소리가 예상되지만 백강혁의 수술 실력에 반해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인기리에 종영한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에서 구덕이(임지연)을 연모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사랑 앞에 솔직한 천승휘와 성윤겸으로 1인 2역을 소화하면서 안정된 연기력을 증명한 추영우는 ‘중증외상센터’에서도 양재원을 매력적으로 만들어냈다.
주지훈과 추영우는 백강혁과 양재원이 서로에게 의지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는 사제지간의 관계로 재미를 만들어낸다. 굳이 왜 자신을 제자로 택했는지 묻는 양재원의 질문에 백강혁은 “볼 때마다 환자를 살리겠다고 달리고 있어서”라고 답한다. 그 말에 양재원은 “저 선택하신 거 후회하지 않게 해드릴게요”라고 답하면서 성장한다.
중증외상팀의 퍼즐은 백강혁과 양재원을 필두로 하나씩 맞춰져간다. “우리 뭐, 인정받자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라던 5년 차 시니어 간호사 천장미(하영)은 백강혁에게 또다른 손이 되어주고, 양재원에게는 또다른 정신적인 위로가 되어준다. 백강혁이 교수로 부임한 첫날,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한 천장미는 ‘조폭’이라고 불리며 양재원처럼 별명을 얻게 된다. 하영은 천장미의 쿨하고 터프한 성격을 원작과의 높은 싱크로율로 그려낸다. 구급차 운전대를 거침없이 몰고, 마취과 선생의 불성실한 태도에 으르릉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도 중요한 것은 백강혁과 같은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조용하지만 내면에 단단함을 숨긴 마취과 레지던트 박경원(정재광)과 앙숙이었지만 백강혁에게 동화되어 돕는 항문외과 과장 한유림(윤경호)는 ‘중증외상센터’을 구성하는 어벤져스의 일원이다. 중요한 전문의 수술을 앞뒀음에도, 모두가 가지 않는 응급환자 수술에 자진해서 참여하는 박경원은 이상적이다. 반면 한유림은 딸의 수술을 도와준 백강혁이 환자를 위하는 진심을 알면서 변화하는 인간적인 인물이다. 정재광과 윤경호는 서로 상반된 태도지만, 백강혁이 이끄는 중증외상팀의 중요한 퍼즐이 되어 극의 재미를 더한다.
계속해서 시스템이라는 커다란 벽에 부딪히고, 그것을 ‘팀’으로 해결해나가는 ‘중증외상센터’의 이야기는 현실적인 히어로물로서 느껴지게 한다. 남들과는 다른 재능을 지닌 백강혁만을 필두로 한 영웅 서사였다면 ‘중증외상센터’의 뿌리를 깊숙하게 박지 못했지 모른다. 단 하나를라도 빠진다면,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을 팀으로 ‘중증외상센터’를 그리며 ‘언젠가는 현실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작지만 강렬한 염원을 품게 된다.
연출 : 이도윤 / 각본 : 최태강 / 출연: 주지훈, 추영우, 하영, 정재광, 윤경호, 김선영, 김원해, 김의성, 김재원 외 / 장르: 의학, 드라마, 판타지 / 공개일: 2025년1월24일 / 관람등급: 15세 이상 시청가 / 회차 : 8부작 / 공개 : 넷플릭스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
로 나눠 공개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