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두 청춘이 풋풋하지만 애처로운 사랑을 나눈다. 도경수와 원진아가 주연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설 연휴에 맞춰 27일 개봉한다. 2008년 국내서 개봉해 사랑받은 대만의 멜로 영화가 원작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감독 서유민·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은 원작의 고유한 설정을 이어가면서도 리메이크만의 새로운 장치와 감성을 더했다. 극의 배경은 2019년,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피아니스트 유준(도경수)이 손목 떨림을 치료하고자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돌아왔다가 피아노 연습실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끌린다. 그곳에서 정아(원진아)를 만난 유준은 비밀이 많은 그녀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느끼면서 점차 빠져든다.
한국에서 다시 만들어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원작과 비교해 시대와 공간 등 중심 줄기는 물론 두 캐릭터와 주변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과 장면, 음악의 활용까지 세밀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변화를 시도한다.
● 원작과 다른 매력…도경수·원진아의 사랑
대만의 원작은 예술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전학생 상륜(저우제룬)이 비밀이 많은 소녀 샤오위(구이룬메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고등학교가 배경인 원작과 달리 이번 리메이크 영화는 대학교로 무대를 바꿨다. 그만큼 캐릭터도 차이가 있다. 원작의 상륜과 리메이크 영화에서의 유준이 오직 사랑에 집중한 모습은 같지만,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서로 다르다.
늘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취를 감추는 샤오위에 의해 상륜은 혼란스러워한다. 궁금한 점을 물어도 “비밀이야”라는 말만 반복하기에, 그의 기분은 들떴다가 추락하기를 반복한다. 원작에서 저우제룬은 사춘기 소년이 조심스럽게 첫사랑을 알아채고 다가가는 느낌이다. 상대를 궁금해하지만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종종 상념에 젖으면서 아련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풍긴다.
반면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도경수는 과감하고 단호하다. 그가 연기한 유준은 정아를 계속 만나고 싶어 휴대폰 번호를 묻고, 집으로도 초대하는 적극적인 모습이다. 피아노 독주회를 함께 보자는 약속에 나타나지 않은 정아를 다시 만나서는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정아에게 생긴 궁금증을 솔직하게 묻기도 한다.
원작과 리메이크에는 “다신 사라지지마”라는 대사가 나란히 등장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스타일은 다르다. 상륜의 외침이 애절하다면 유준의 성토는 간절하다. 나아가 유준은 “너 여기서 가면 다시는 안 봐”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더 피력한다.
여주인공의 모습도 달라졌다. 원작에서 샤오위는 미스터리하다. 그와 관련한 정보가 제한적이고 비밀을 알고 있는 엄마의 존재도 후반부에서야 드러난다. 천식을 앓는 설정이 샤오위에 대한 유일한 단서일 뿐이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단정한 교복을 입은 모습에 어울리는 명랑함보다 슬픔이 느껴진다.
원진아가 표현한 정아는 밝은 햇살 같은 에너지를 품었다. 정아와 관련한 정보도 원작보다 다양해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줄었다. 원진아는 자신이 품은 비밀이 버거워 언제라도 유준에게 털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답답한 정아의 심정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배우들의 로맨스 호흡은 원작과 비교해 더 달콤해졌다. 원작에서 상륜과 샤오위의 첫사랑은 슬픔의 정서가 짙다면 유준과 정아의 사랑은 달짝지근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쓰다. 그 안에서 배우들의 활약은 빛난다. 영화에서는 처음 멜로 장르에 도전한 도경수와 여러 드라마에서 가슴 시린 멜로를 연기한 원진아는 원작의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색다르게 표현한다.
● 설렘 지수 높이는 ‘결정적 장면들’
# 낭만적인 자전거 하교
자전거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주인공들이 가장 친밀하게 만나는 매개체다. 원작에서 상륜은 자전거 뒷좌석에 샤오위를 태우고 집에 데려다준다. 샤오위는 그의 어깨를 붙잡거나 등에 기대기도 한다. 유준과 정아에게도 자전거는 중요하다. 유준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탄 정아는 넓은 캠퍼스를 미끄러지듯 달린다. 가장 낭만적인 장면으로도 꼽힌다.
# 첫 만남을 이끄는 피아노 곡
피아노 역시 두 주인공을 잇는 수단이다. 상륜은 철거를 앞둔 연습실에서 들리는 피아노 연주에 이끌려 샤오위를 만난다. 원작의 설정 그대로 유준 역시 이번 학기가 끝나면 철거되는 음대 건물의 피아노 연습실에서 정아와 처음 마주친다. 그 때 피아노 연주곡 ‘시크릿'(Secret)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두 주인공이 첫 만남에서 연주하는 곡이자, 시간 여행의 비밀을 담은 곡이기도 하다.
‘시크릿’이 흐를 때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사 역시 원작과 동일하다. “집에 가기 전엔 늘 이렇게 빨리 쳐” “옛날 피아노실에서는 이 곡을 치면 안 돼” 등의 대사다. 다만 묘사의 차이는 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찾아보는 재미도 이번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더 흥미롭게 감상하는 방법이다.
# 반전 품은 걸음수
피아노 연습실에서부터 상륜이 있는 교실까지 샤오위는 눈을 감고 걸어가며 발걸음의 숫자를 센다. 엉뚱해 보이지만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비밀과 맞닿은 중요 장면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정아 역시 피아노 연습실에서부터 유준이 머무르는 강의실까지의 걸음수를 센다. 왜 이들이 걸음수를 세는지를 유심히 지켜본다면, 마지막에 드러는 반전이 더 크게 다가온다.
# 아버지가 일깨우는 사랑의 가치
유준과 아버지가 투닥거리면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웃음을 만든다. 배경을 대학으로 바꾼 만큼 유준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의 설정. 유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묻기도 하고, 조언을 건네거나 놀리기도 한다. 아버지는 유준에게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말한다. 한낮의 열기를 닮은 첫사랑에 빠진 아들에 사랑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그 아버지는 원작에서처럼 후반부에 드러나는 비밀의 열쇠를 쥔 인물로 눈여겨 봐야 한다.
# 시공간 초월하는 결정적 순간
원작의 팬들은 영화 말미 책상에 글자가 새겨지는 명장면을 여전히 기억한다. 비밀스럽게 엇갈리던 주인공들의 사랑이 확인되는 장면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이 장면은 리메이크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장소가 달라졌다. 책상이 아닌 제3의 공간에서 서로를 향한 애절한 마음이 확인된다. 감정이 증폭된 원작과 달리 서유민 감독은 최대한 담백하게 연출한다.
●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음악
# 피아노 연주 배틀
두 대의 피아노를 두고, 두 명의 연주자가 서로 마주 보면서 연주하는 배틀 장면은 원작은 물론 이번 리메이크에서도 시그니처로 꼽힌다. 희귀한 악보가 우승 상품으로 걸린 피아노 대결에 상륜은 샤오위를 위해 참가한다. 원작에서는 쇼팽의 ‘흑건'(에튀드 Op. 10, No 5)과 ‘왈츠'(Op.64, No. 2)를 편곡한 곡을 다루면서 카메라가 유영하듯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식의 연출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리메이크에서는 동일한 설정이지만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솔로를 편곡해 활용했다.
# 레코드 가게 방문
유준과 정아는 레코드 가게에서 1985년 발매된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를 함께 듣는다. “매일 그대와 도란도란 둘이서, 매일 그대와 얘기 하고파”라는 가사가 이들이 나누는 사랑 위로 포개진다. 서유민 감독은 “둘이 사랑을 느낄 때 듣는 곡이라 행복한 가사이길 바랐고 슬프지 않은 멜로디지만 동시에 슬픈 정서도 느껴질 수 있는 곡이길 원했다”고 ‘매일 그대와’를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원작에서도 상륜과 샤오위의 상황을 은유한 노래 ‘정인적안루’가 삽입됐다. “당신을 만나면 왜 눈물이 떨어지는지, 그것이 사랑 때문이라고 당신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라는 가사의 곡이다.
# 결정적인 테마곡 ‘시크릿’의 활용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관통하는 테마곡 ‘시크릿’은 판타지 멜로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에서 이 곡은 ‘시크릿’은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하다. 원작에서 샤오위는 1979년 음악실 피아노에 끼어있는 ‘시크릿’의 악보를 줍고 곡을 연주하면서 1999년의 상륜이 있는 미래로 가게 된다. 리메이크작에서도 그대로 삽입된다. 서유민 감독은 “‘시크릿’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시그니처 같은 곡이기에 꼭 사용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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