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딸 애나를 홀로 키우는 실비아(제시카 차스테인)의 얼굴에는 이유는 짐작하기 힘들지만 애써 덮어놓은 처연함과 고단함이 감돈다. 13년간 금주를 하며 재활 모임에 의지를 보이고 성인 돌봄 센터에서 일하며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만, 정작 실비아에게서는 즐거움보다도 지루함과 무력한 인상을 지워낼 수 없다.
동생 올리비아를 따라 우드버리 고등학교 동창회에 간 실비아는 대화에 끼지 못하고 겉돌며, 모두가 술잔을 올릴 때에도 혼자 내리는 아웃사이더 기질을 숨기지 않는다. 파티를 즐기지 못하고 상념에 젖어있던 실비아 앞에 낯선 남자가 나타나 말을 걸지만, 이내 그녀는 자리를 피하고 만다. 낯선 남자는 파티를 빠져나온 실비아의 뒤를 쫓아 지하철역에 탑승하고 심지어는 집 앞까지 따라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밤새 정처 없이 맴돌며 비를 맞는다.
물밑에 강한 소용돌이를 숨기던 그녀의 삶에는 낯선 남자 사울(피터 사스가드)로 인해 기포가 뽀글거리며 용솟음친다. 멕시코 출신의 감독 미셸 프랑코의 영화 ‘메모리’는 실비아가 품에 안은 상처의 원형을 명확하게 짚어주기보다는, 주변인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야만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타인의 집을 따라왔던 사울의 행동은 얼핏 보기에도 스토커와 다를 바가 없지만, 다음날 실비아의 집 앞에서 잠든 채로 발견된 사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젯밤에 파티에서 빠져나온 것을 제외하면 이곳이 어디고 눈앞에 있는 낯선 여자는 누구인지 몰라 혼란스럽다.
실비아는 어젯밤 공포의 대상이었던 사울을 지나치거나 모른척하지 않고 보호자를 찾아준다. 사울은 젊은 나이지만, 가까운 기억부터 무작위로 삭제되는 치매 증세를 앓고 있다. 연민일지 동정일지 혹은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분노일지 모를 실비아의 호기심과 관심은 굳게 잠겨있던 기억의 문을 열어젖힌다. 현관문에 걸쇠와 이중 잠금을 해놓을 정도로 경계심이 높고 신경쇠약을 겪던 실비아는 사울을 만나 자신의 결함을 타인과 결합한다.
● 푸석거리지만 아름다운 로맨스
겉으로 보기에 실비아와 사울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따지자면 평범함 쪽에 무게 추가 기울어져있다.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꿋꿋하게 딸을 키우는 실비아와 전날 밤의 일을 젠틀하게 사과하는 사울의 상흔을 식별하기 위해선 미셸 프랑코 감독이 쌓아놓은 기억의 여정을 순차적으로 따라가야만 한다.
파티에서 집까지 따라온 이유를 묻던 실비아와 사울의 대화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무표정했던 실비아의 얼굴은 사울이 벤 골드버그과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일그러진다. 12살 무렵, 실비아는 벤 골드버그를 중심으로 한 17살 학우들에게 강간을 당했고 그 역시 ‘가해자 중 한 명이 아니냐’는 것이다.
희미하지만 뾰족한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은 실비아는 치매 증세로 인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울에게 “자기가 유리한 쪽만 기억하는 건가”, “그거 알아? 그렇게 된 거 천벌 받은 거야”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치밀어 오른 분노를 이기지 못한 실비아는 사울의 목에 걸린 ‘치매 환자’라는 병명과 보호자의 연락처가 적힌 식별 목걸이마저 가지고 도망치기도 한다. 집 앞에 있던 사울을 지나치지 못했듯, 실비아는 다시 그 장소로 돌아간다. 이후 동생 올리비아로 인해 1986년 이사온 사울과 그 해에 고등학교를 그만둔 자신 사이에 접점이 없었음을 알게 되고는 오해를 사과한다.
제시카 차스테인은 실비아의 경직되어 있던 얼굴의 안면근육이 사울을 만나 찌푸려지고 일그러져 맨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미셸 프랑코 감독은 제시카 차스테인의 측면 얼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데, 반쯤 가려진 표정으로 인해 처연함마저 감돈다. 2022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타미 페이의 눈’의 화장기 짙은 강렬한 얼굴은 생각나지 않을만큼, 미사여구 없이 덜어내고 또 덜어낸 연기는 감정을 온전히 따라가게 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작지만 확실한 숨구멍이 되어준다. 사울의 조카는 실비아에게 돈을 지급할 테니, 큰아빠를 돌봐달라는 난감한 부탁을 해온다. 부담스러움에 거절을 했던 실비아는 자신의 오해로 인해 무례를 범했던 상황으로 인해 다시 제안을 수락한다. 실비아와 사울이 일상을 나누며 서로에게 스며드는 모습은 마음 한구석이 포근해지는 느낌이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카드 게임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일상적인 풍경이 그러하다.
이들의 사랑은 같은 영화를 보다가 우는 타이밍이 달라도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그런 종류다. 나무에서 떨어져 곧 바스러질 낙엽처럼 푸석거리지만 아름답다. 영화는 두 사람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처럼 묘사하기보다는, 가끔 작동을 멈추지만 누군가의 수리로 재가동이 가능한 보통의 사람들로 그려낸다. 욕조 안에서 홀로 울음과 우울을 삼켜내던 사울의 단독컷은 이후, 함께 울음과 상처를 토해내는 욕조 안의 투샷으로 변화한다. 그들에게 있어 슬픔을 털어놓을 유일한 면적인 욕조 안에서 실비아의 상흔에 사울은 기꺼이 몸을 내어 안아주며 토닥여준다.
‘메모리’로 2023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터 사스가드는 “어머니는 왜 당신 말을 안 믿어줬죠? 물어봐도 돼요?”라며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따스한 심성과 가끔 화장실에서 넘어지고 잠들어도, 듬직한 사울의 인간성을 덧댄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수첩에 메모를 하고 멍하게 어딘가를 쳐다보는 사울의 행동은 그래서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차츰 사울이 품고 있던 본래의 몸짓은 지우개를 가져다 댄듯 지워지고, 두 사람이 시작한 사랑의 끝이 새로 그려진다.
● 기억의 굴레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 망가진 여자와 과거의 기억만 남아 붕괴되어 가는 남자의 만남은 쓰리다. 다른 방식으로 ‘현재’를 재건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결국 두 사람의 시간선(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선) 방향은 달라질 것이라는 씁쓸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 사울은 치매 증세가 나빠질 것이고 실비아는 남겨질테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미셸 프랑코 감독의 말처럼, ‘메모리’는 두 사람이 겪어온 과거 자체가 어땠는지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구태여 설명하며 힘을 빼지 않는다. 전작인 ‘썬다운’과 ‘에이프릴의 딸’처럼, 버거운 상황에 둘러싸인 인물들이 벗어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몸부림치며 느끼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는다.
특히 가족 내에서 문제아처럼 여겨지는 구성원의 분리 과정은 ‘메모리’ 안에서도 주요하게 그려진다. 가족들에게 있어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고장 난 이들의 결합은 반갑지 않다. 동생 아이작은 형 사울이 이성적, 객관적 판단이 안 된다며 계좌를 묶거나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알코올 중독자’였던 실비아는 가족들 사이에서 늘 염려의 대상이다. 동생 올리비아는 늘 실비아의 집을 들여다보면서 염려하고 또 살피며, 사춘기 딸은 이성과의 만남을 통제하고 강압적이며 종종 우울감에 빠져드는 엄마가 이상하다고 여긴다.
왜인지 실비아는 오랜 기간 동안 엄마와도 교류 자체를 끊었다. 막바지에 도달해서야 과거 학교에서 발생했던 불미스러운 일과 함께 가족 내부에서 쉬쉬하던 실비아의 또 다른 비밀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언제 보글보글 올라와 ‘톡’하고 터질지 모르는 실비아의 상흔은 가족들에게도 불편한 진실이 된다. 후반부에 실비아가 묵혀왔던 감정을 토해내는 시퀀스는 속 시원하다기보다는 먹먹한 느낌이 든다.
과거와 현재의 상처를 애써서 치료하겠다는 거창한 목표 대신 상대의 상처를 들여다는 태도를 지녔기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던 이유다. ‘미래’는 물음표로 남았지만, 그들은 그 공백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메우고 저장하고 기억하지 않을까.
감독: 미셸 프랑코 / 출연 : 제시카 차스테인, 피터 사스가드 외 / 배급 : 티캐스트 / 개봉일: 1월22일/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3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
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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