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윌리엄 세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1968년, 올리비아 핫세를 줄리엣으로 영화화
1996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로미오 되다
21세기 K-드라마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
드라마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극본 임예진, 연출 박준화·배희영, 제작 스튜디오드래곤·블리츠웨이프로덕션, 이하 ‘사외다’)가 2024년과 함께 끝났다. 2024년은 다시 올 수 없어도, ‘사외다’는 영원하다.
OTT(Over The Top, 인터넷TV)가 고마운 순간이다. tvN 방영분 그대로 티빙과 디즈니+에서 계속 볼 수 있다.
주지훈과 정유미 주연 ‘사외다’의 최종회 시청률은 6.5%였지만, 화제성은 그 이상이었다. 시청자 댓글들을 보면 많은 이가 방송 시작을 공유하고, 메인 스토리 라인뿐 아니라 다양한 캐릭터들의 서브 스토리도 즐기고, 평생 지속형 사랑을 눈물 젖은 신파가 아니라 유쾌한 티키타카로 주고받는 ‘두 지원’ 윤지원(정유미 분)과 석지원(주지훈 분)을 보며 그 귀여움에 설레고 미소 짓고 응원한다.
사실 ‘사외다’의 기본 스토리 구조는 전형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은 고난과 핍박을 먹고 자란다는 고전적 주제를 따르는 건 기본.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16세기 말(1597년 초판 발행) 세상에 나온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절절한 사랑의 공식이 되어버린 ‘원수 집안의 두 자식’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흔히 영화로 저장돼 있다. 혹자는 프란코 체피렐리 감독의 1968년 작을, 누군가는 바즈 루어만 감독의 1996년 작을 떠올릴 것이다. 두 감독 모두 세계적 거장이지만, 감독의 이름만으로는 확실하게 연상되지 않을 수 있다. 올리비아 핫세(줄리엣 역)와 레오나드 위팅(로미오 역) 주연의 영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미오 역)와 클레어 데인즈(줄리엣 역) 주연의 영화라고 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다시금 ‘이야기와 작품을 관객 마음으로 배달하는 배우’의 중요성이 확인되는 대목인데. 재미있는 것은 1968년 작에서는 ‘줄리엣’ 핫세가, 1996년 작에서는 ‘로미오’ 디캐프리오가 더욱 깊게 각인돼 있다.
그렇다면, 2024년 한국으로, 드라마로 옮겨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누가 더 강한 인상을 남겼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것은 두 주연배우뿐 아니라 출연진 모두가 호연을 한 영향도 있거니와. 애초 이 드라마의 출발과 목적지가 원수 집안의 피 튀기는 대립과 복수에 있지 않고, 꽁꽁 언 복수심과 날 선 대립각을 스르르 녹이고 부드럽게 깎는 ‘두 지원’의 사랑과 화해에 있기에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배우들은 이러한 작품의 결, 그리고 그 안에서 본인이 해야 하는 역할을 확실히 알고 있다. 이를테면, 원수 집안의 수장 격인 김갑수(윤재호 역)와 이병준(석경태 역)은 치고받는 상처와 복수심은 크나 동시에 인생 오래 산 이들의 지혜도 엿보여야 하는데, 결국 화해할 걸 은근히 들키면서도 또 열렬히 싸우는 대배우들의 케미스트리가 기막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에 각각의 삼각관계로 끼어드는 이시우(공문수 역)와 김예원(차지혜 역)도 주인공들에게 질투를 유발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그들의 사랑에 위협이 됨과 동시에 사랑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했다. 여느 삼각관계 캐릭터와 사뭇 다른 임무가 주어졌으나 훌륭히 완수했고, 배우 각자의 매력 어필도 잊지 않았다.
주인공만 사랑하라는 법 있나. 전혜진과 김재철은 솔직한 직진형 맹수아와 무게감 있는 방어형 홍태오를 맡아 ‘밀고 당기는 묘미’, 일상과 인생의 무게를 잔잔히 전한다. ‘사귀어라, 사귀어라’ 서브 러브라인을 응원하게 하는 힘이 두 배우에게 있다.
뿐만이 아니다. 석지원 엄마로 분한 김정영은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배우의 모습으로, 집안 간 원한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열린 사고’를 보여주고. 윤재호가 아들처럼 아끼는 지경훈은 ‘사외다’의 유일한 빌런인데 ‘순한’ 드라마 결에 맞게 선한 인상의 이승준이 제격 캐스팅됐다.
드라마가 독목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다 보니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등장이 필수인데, 보기만 해도 ‘해피 바이러스’ 펑펑 솟는 배우들이 큰 웃음을 준다. 두 지원의 담임이었던 진학부장 변덕수 역의 윤서현, 창의체험부장 이재규 역의 김희창, 교감 강영재 역의 백현주 등은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학생 역으로는 두 지원의 고교 시절(2006년 당시)을 연기한 오예주와 홍민기의 매력이 압도적이지만. 2024년 현재, 체육 교사인 윤지원이 담임을 맡은 반의 반장 고해수 역의 최윤지와 그를 좋아하는 전교 꼴지 엄기석 역의 조범규 등도 배우로서 전도가 유망하다.
독목고에서 외로운 섬이 있으니 재단 이사장 석지원과 그의 비서다. 비서 이기하 역의 김현목은 이사장 역의 주지훈과 아주 쫀득한 ‘브라더 케미’를 과시한다. 두 캐릭터가 등장하면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친구들을 보듯 즐거워진다.
이제 다시 피해 갈 수 없는 자문자답이다. 정유미도 주지훈도 빛났어요, 라고 답하는 건 비겁하다.
1996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클레어 데인즈가 연기한 줄리엣을 보며 1968년 작의 올리비아 핫세 표 줄리엣에 비해 매우 당차졌다고 생각했다. 21세기 줄리엣, 정유미의 윤지원은 당찰 뿐 아니라 맑고 밝고 사랑스럽다. 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 2019)에서 드러낸 아름다운 얼굴과 심상 깊은 연기, 영화 ‘잠’(감독 유재선, 2023)에서 발산한 광기도 너무 좋지만 배우 정유미는 ‘사외다’에서처럼 엉뚱함이 겹칠 때 더욱 개성 있게 귀엽고 사랑스럽다.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윤지원으로 정유미가 완성했다.
이미 짐작하신 독자들이 많겠지만, 맞다, ‘21세기 로미오’ 주지훈에게 더 큰 마음의 조각을 내주었다. 석지훈이라는 캐릭터의 영향이 있고, 그 석지훈을 따스하게 빚어낸 주지훈의 공이 크다.
앞서 잠시 말했듯 석지원 재단 이사장은 체육 선생님 윤지원에 비해 독목고에서 기댈 데 없는 캐릭터다. 윤지원 곁에는 여러 인물이 바글거리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캐릭터다. 하지만 석지원은 언제나 (윤)지원이 있는 곳으로, 그곳이 선생님들의 회식 자리든 워크샵이든 사택이든 비집고 들어가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배우 주지훈은 석지원의 그러한 행동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의도된 목표지향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이끌리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보이게 그렸다. 석지원의 진심을 시청자의 마음에 누수 없이 배달했다.
무엇보다, 세상에 어디 이런 사랑 없나요? 묻고 싶게 지고지순한 사랑의 결정체를 보여주었다. 먼저 좋아하고, 다시 사는 인생까지 모든 걸 주었으면서도 18년 만의 만남에 볼이나 꼬집히고, 꼬집혀 놓고도 또다시 좋다고 영혼의 반쪽 지원을 향해 모든 걸 내주려 한다. 매 순간이 진심이고 정성이다.
뭐가 모자란 ‘놈’이라서가 아니라 키 크고 잘생기고 착하고 속 깊고 사회적으로 성공까지 해서 모든 걸 갖추고도 ‘사랑 앞에 영원한 약자’이다. 여자를 안아도 키 작은 상대를 제 쪽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제 등을 숙여 깊이 안는다. 안아도 그냥 안는 게 아니라 큼직한 손으로 토닥토닥 장면이 바뀔 때까지 ‘손끝’에 ‘끝까지’ 정성을 담는 주지훈이다. 배우의 넉넉한 품과 포근한 인성에 기대 캐릭터가 빚어졌다.
여자들이 바라는 이상형이라고 하지 않겠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나이 불문하고 누군들 이런 사랑을 꿈꾸지 않겠는가. 꿈을 눈앞에, 손에 잡히게 보여주었다. 연기 센스가 매우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배우 주지훈에 대한 과소평가였음을 자백한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눈빛 하나와 내쉬는 한숨까지 진심임을 이제 알겠다.
피도 튀지 않고 총칼 휘두르지 않는 드라마, 둥글둥글 생긴 작품이 뒹굴뒹굴 굴러가는 ‘사외다’여서 배우들의 진심을 읽는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는지 모르겠다. 두 지원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어린이 배우, 드라마 마지막 회에 등장해도 첫 회부터 있었던 듯 연기하는 고수 김혜옥까지 어느 배역 하나 허투루 캐스팅하지 않고. 우리 마음속 풋풋한 사랑을 끄집어냄에 있어 추억이 손상되지 않게 어여쁜 화면으로 담아낸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 연출·제작진의 정성을 OTT에서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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