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님’ 이미지가 생겼으니 정말로 백마를 타고 졸업을 하자고 결심했죠. 그래서 ‘더 킹: 영원의 군주’를 왕자님 이미지의 졸업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출연했어요.”
배우 이민호가 지난 12월25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말한 것처럼, 시청자들은 그에게서 ‘백마 탄 왕자님’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짙은 쌍거풀과 오똑한 콧날, 여유 넘치는 말투도 그동안 맡아온 캐릭터와 포개지며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다.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그 첫 무대였다. 극 중 구준표는 처음으로 이민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왕자님 혹은 재벌집 아들의 이미지를 만들어줬다. ‘Almost paradise~ / 아침보다 더 눈부신..’이라 노래하는 수록곡 ‘파라다이스’가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낯익은 것처럼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32.9%(닐슨코리아)를 기록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꽃보다 남자’는 사립고교생들의 치기 어린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를 그렸다. 동명의 일본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다소 오글거리고 유치한 상황과 대사들이 이어지만 열기는 어마어마했다.
윤지후(김현중), 소이정(김범), 송우빈(김준)과 함께 일명 ‘F4′(꽃처럼 아름다운 남자 4명)으로 불린 캐릭터들의 중심에 구준표가 있었다. 이민호는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안하무인의 까칠한 성격에 자신이 잘난 맛에 사는 부족할 것 없는 구준표가 여주인공 금잔디(구혜선)를 만나 꼿꼿했던 성격이 말랑해지는 감정을 단계적으로 세밀하게 표현했다. 원작에서 묘사된 구준표의 트레이드 마크인 뽀글거리는 굵은 웨이브펌과 모피코트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간절하게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자신에게 알맞는 스타일의 작품을 입길 기다리던 이민호에게 왕자 이미지가 부여된 순간이었다.
“혹시 나 너 좋아하냐?”라며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문장 구조로, 신박하게 고백하던 2013년 드라마 ‘상속자들’의 김탄 캐릭터도 이미지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 주었다. 차은상(박신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툭’하고 건네는 대사는 자신의 레이더망 안에 들어와 꽃히는 것이 있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김탄의 캐릭터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상속자들’은 대한민국 상위 1%에 속하는 상류층 고등학생들이 다니는 제국고등학교에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차은상이 입학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김탄 역의 이민호는 ‘꽃보다 남자’처럼 같은 재벌가의 이야기더라도 말투와 표정에서 변주를 주며 제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이민호는 단단해 보이고 강인해 보이는 서자 출신 김탄의 외롭고 애처로운 실제 속내를, 좋아하는 차은상 앞에서만큼은 감추지 못하고 솔직하게 삐져나오는 모습을 묘사해냈다.
이후 2020년 ‘더 킹: 영원의 군주’를 거쳐 최근작인 애플 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 시리즈를 통해 그는 왕자 이미지를 탈피하며 자신의 새로운 연기 챕터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파친코’ 시리즈에서 이민호는 가난의 밑바닥부터 시작해 자수성가를 이룬 한수 역을 연기했다. 1915년부터 1989년까지 재일 한국 이민자 가족의 생존기를 그린 ‘파친코’에서 그는 선자(김민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노아 앞에서만 특유의 무심한 표정 너머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강한 집념을 드러내며 이를 연대기적 서사 안에 녹여냈다. 그는 선자가 자신의 핏줄을 출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쫓아가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한다. 위험할 때마다 자신이 지닌 자본으로 해결하고, 삐뚤어진 소유욕과 통제욕으로 그들의 삶을 장악하려 한다.
시청자들은 ‘파친코’ 시리즈 속 일련의 서사 안에서 변모하고 충돌하는 한수 캐릭터를 연기한 이민호에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오디션에 곱슬머리를 하고 오디션장에 갔던 것처럼, 극 중 한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흰색 정장을 미리 제작해 입고 ‘파친코’ 오디션에 응했다. ‘왜 이 작품을 만들고 싶냐’고 역질문을 던지며 열의를 보여줬고, 다음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고 비하인드를 밝혔다. ‘꽃보다 남자’ 이후 무려 13년 만에 두 번째 챕터의 막을 다시 연 것이다.
오는 4일 첫 방영하는 tvN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극본 서숙향·연출 박신우, 김진성, 오승열)는 이민호가 새롭게 막을 여는 두 번째 챕터로 자신만의 문장을 써내려갈 것을 예고했다. 한국 드라마로는 처음으로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별들에게 물어봐’는 무중력 우주정거장에서 일하는 우주비행사(공효진)와 우주관광객 자격으로 며칠간 머무르는 산부인과 의사이자 재벌가 예비사위(이민호)가 벌이는 로맨스를 그린다. 이민호는 우주정거장에서 일하는 대원들과 한 공간 안에서 피부를 맞대며 투닥거리는 ‘사람 사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상류층 사회의 중심에서 그 테두리 바깥 사람들과 만났던 전작들과 달리 ‘별들에게 물어봐’에서는 우주정거장 안의 결합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외부인으로서 색다름을 보여줄 기세다.
해외 자본으로 만들어진 ‘파친코’ 시리즈를 제외하면, ‘별들에게 물어봐’로 5년 만에 한국 드라마로 시청자를 만나는 이민호는 “30대가 되면서 계속 소모되는 배우가 아니라 뭔가를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며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적당히 새로운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의도치 않게 제작(기간)이 늘 오래 걸리고 역경과 고난이 있는 작품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명의 인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의 상반기 개봉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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