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지금까지도 학계로부터 큰 질타를 받고 있다. 특히 승리가 머지 않았던 미국이 원자폭탄까지 투하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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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고민하던 일본에 원자폭탄 공격한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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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미국에 밀려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이 확실한 상태였다. 일본 해군은 구레 군항 공습으로 강제 해체된 상황과 다를 바 없었고 군수물자 자원도 부족해 일본군과 일본 국민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일본에 1945년 8월1일까지 항복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다고 선언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이에 미국은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다만 미국은 최후의 수단이었던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일본에 기회를 줬다.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고 항복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이에 당시 총리였던 스즈키 간타로는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을 표현만 바꿔 말한 것으로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고 밝혔다.
해당 발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결정에 더 힘을 실었다. 문제는 미국과 영국 등 서구 국가에선 해당 발언을 ‘묵살’이라고 판단했지만 일본에선 해당 발언이 유보를 뜻했다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 스즈키 총리의 발언이 잘못 이해된 일은 결국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킨 처참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포츠담 선언 이후 본격적으로 원자폭탄 투하를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목표선정위원회를 구성해 어디에 폭탄을 투하할 것인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목표선정위원회는 지름 3마일(4.8km) 이상이고 주요 목표물이 있는 도시, 원자폭탄 폭발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곳, 1945년 8월까지 폭격받을 계획이 없는 곳을 기준으로 위치를 선정했다.
선정 기준을 토대로 제일 높은 우선순위를 받은 지역이 바로 히로시마였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군 창고와 항구가 있었다. 또 일본 해군의 주요 군항도 있었기 때문에 폭탄 투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미국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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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 터진 원자폭탄… 현실 부정에 빠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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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15초 페러비 미국 소령은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 다리를 조준하며 원자폭탄 리틀 보이 투하 스위치를 눌렀다. 페러비 소령에 이어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동시에 계측 장치를 투하했고 8시16분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다.원자폭탄 리틀 보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순수한 흰색이라고 증언했다. 그들은 손으로 눈을 가리니 뼈가 보였다고 전했다. 그렇게 히로시마는 초토화됐다.
폭탄이 터진 후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히로시마의 대기가 건조해지면서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가 됐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방에 널린 죽지 않은 부상자들의 신음, 비명과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며 다리 밑으로 떨어져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사람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이 이어졌다.
이러한 참상에 일본 정부가 보인 반응은 현실 부정이었다. 원자폭탄 투하 다음날인 1945년 8월7일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다 요시오 박사가 히로시마 현장 조사 후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이 맞다고 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이를 부정했다.
패닉에 빠진 일본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1945년 8월9일 오전 11시2분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번째 핵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결국 일본 정부는 미국을 상대로 어떤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1945년 8월15일 일본 천황 쇼와 덴노는 녹음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패망이 공식적으로 확정되면서 일본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은 드디어 해방의 순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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