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장관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아세안 주최 외교장관회의 만찬이 열린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NCC)에서 리 대사를 보고선 그를 불렀지만, 리 대사는 못 들은 것처럼 앞만 보고 걸어갔다. 이후 조 장관은 리 대사에게 직접 다가가 팔을 만지며 말을 걸었지만, 리 대사는 뒷짐을 지고 조 장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조 장관은 리 대사가 반응이 없자 곧바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말 그대로 머쓱한 상황이 연출됐다.
만찬 종료 후 취재진과 만난 조 장관은 “북한 대표단과 대화가 됐느냐”고 묻는 취재진에게 “하려고 했는데 안 됐다. 악수를 피하더라. 말을 걸었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라고 답했다. “다시 만나면 대화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엔 “상대가 반응을 안 하는데 뭐라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앞서 조 장관은 지난달 25일 라오스 입국길에 비엔티안 왓타이 국제공항에서 취재진과 만나 북한 대표단을 만나면 어떤 언급을 할지 묻자 “(북한 측이) 대화에 응할지는 잘 모르겠다”면서도 “비핵화에 관한 우리 입장을 분명히 전하고 대화에 열려 있단 입장을 밝히겠다. 불법 도발 행위를 중단하고, 러시아와 밀착과 군사 협력을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 장관의 예상대로 북측이 전혀 대화에 응하지 않으면서 남북 고위급 외교 당국자 간 소통은 불발됐다. 리 대사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장으로 들어가면서도 한국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한국 취재진이 다가가자 경호원이 강하게 제지하기도 했다.
지난 2018년 싱가포르 ARF 땐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이 갈라 만찬에서 먼저 이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다가가 공식 회담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 외무상은 이를 거절하며 “외교장관 회담에 응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2022년 캄보디아 ARF 땐 박진 당시 외교부 장관이 안광일 주아세안 북한 대사에게 “남북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자, 안 대사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고 답했다. 안 대사는 지난해 인도네시아 ARF 땐 박 전 장관이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고, 비핵화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를 듣는 모습은 보였다.
조 장관과의 대화를 피한 리 대사는 김일성·김정일 부자 초상 배지를 착용한 모습으로 최선희 북한 외무상을 대신해 참석한 인물이다. 그는 2018년부터 주라오스 북한 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노출이 많이 되지 않은 고위급 당국자로 보인다. 만찬 장소에서 첫 모습을 드러낸 리 대사는 “최 외무상은 왜 안 왔느냐”,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 규탄 여론에 어떤 입장인가”라고 묻는 한국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지나쳤다.
최근 북한은 러시아와 군사 협력, 무기 거래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위반하며 초밀착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대외 접촉의 반경을 넓히고 있지는 않다. 특히 북·중 관계에 이상 기류가 꾸준히 감지되면서 북·러 간 협력이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중국이 대북 경제 지원 등에 미지근하고 북·러 공조에도 거리를 두려 하자, 중국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31일 노동신문, NK뉴스 등에 따르면 왕야쥔 북한 주재 중국 대사는 북한이 그달 27일 정전협정 체결 71주년(전승절)을 맞아 개최한 열병식에 불참했다. 대신 왕 대사는 같은 달 25일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는 중국 인민 의용군 순교자 묘지를 따로 방문했다. 중국과 달리 러시아, 베트남, 몽골, 니카라과 등 다른 주북 대사들은 열병식에 참석했다.
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최근 재중 외교관들에게 ‘중국과 마찰을 두려워하지 말고 업무를 수행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해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31일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조 장관은 “최근 북한의 복합적인 도발과 러·북 밀착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라며 “양국 간 전략적 소통 강화가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왕이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은 “중·한이 그간의 고위급 교류를 통해 외교·안보 분야에서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이웃으로 잘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한 각 분야 교류가 밀접하고, 이익도 깊이 있게 융합돼 있다”며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협력 동반자가 됐다”고 했다. 이어 “중국은 한국과 수교 초심을 견지하고 서로 좋은 이웃 동반자가 돼야 하며, 중·한 관계를 긍정적·안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중 외교 차관도 지난달 24일 서울에서 제10차 외교차관 전략대화를 갖고 북·러 군사 협력 강화 등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상호 관심사에 대해 논의했다. 대면으로 양국 차관이 만나는 건 2017년 6월 이후 7년 1개월 만이다. 우리 측은 이날 북한이 쓰레기 풍선 살포를 비롯한 복합 도발을 감행하는 동시에 러시아와의 밀착 수위를 높여가는 데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또 탈북민의 강제 북송을 중단해 달라는 요청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중·러 공조에 변화가 생기면서 그동안 얼어붙었던 한·중 관계가 개선되고 북·러 관계가 더욱 밀착되고 있는 가운데 미동도 없는 남북 간의 대화가 언제 재개될지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북한이 남측을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한 만큼 양국 관계 개선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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