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에 아직도 해외 원정치료를 가는 환자들이 있다. 병원이 지구촌 어느 국가보다 많고, 수조 원을 벌어들이는 제약기업들이 여럿 있으며, 외국인 환자 유치 실적은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는 한국에서 참 기묘한 일이다. 한국 환자들의 엑소더스는 단지 병을 고칠 기술이나 의사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복잡한 돈 문제가 엉켜있다.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최근 뇌전증 환자를 하와이로 보냈다. 뇌전증 환자는 불규칙적인 발작 위험으로 장시간 여행이 불가능하다. 환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하와이로 날아간 것은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를 투약받기 위해서다. 강준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신경과 교수가 홍 교수와 의기투합해, 한국과 최단 거리 미국 영토인 하와이 또는 괌에서 치료를 돕기로 했다. 물론 현지 영사관과 병원의 협조가 필요해 아직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세노바메이트는 SK바이오팜이 후보물질 발굴부터 출시까지 해내 ‘순수 토종’이라는 수식이 붙는 국산 신약이다.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미국과 유럽에서만 출시했으며, 국내 출시는 빨라도 2026년이다. 글로벌 제약·바이오업계에서 한국 정부는 약값 ‘후려치기로’ 악명이 높다. 한국에 낮은 가격으로 닻을 내리면 다른 국가 정부와 협상에서도 제값을 받을 수 없다.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한국 출시를 미루고, 환자들도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는 형국이다.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들 역시 해외 원정치료를 익숙한 옵션으로 고려했다. 이 병을 치료하는 신약 ‘루타테라’는 국내에서 단 6회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급여 4회, 비급여 2회를 모두 쓴 이후에도 초과 사용이 필요한 환자들은 말레이시아, 독일, 인도 등 지구촌 곳곳으로 날아갔다. 다행히 올해 5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암질환심의위원회는 루타테라의 허가 범위 외 초과 사용을 일부 승인하도록 결정해, 앞으로 중증 암환자들의 목숨을 건 비행이 줄어들지 주목된다.
절약보다 중요한 것은 똑똑한 지출이다.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감기 환자 진료에 9394억6488만4000원을 내줬다. 감기가 ‘병원 가면 7일, 안 가면 일주일’이라는 우스갯말이 따라붙는 대국민 경증질환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도한 지출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같은 기간 뇌전증의 공단 부담금은 1253억662만5000원에 그쳤다. 희귀암으로 분류되는 신경내분비종양은 급여 혜택을 받기 위해 수백 장의 입증 서류와 절차가 필요하다.
희귀·난치병의 치료 접근성과 지원이 감기의 반절 수준만 돼도 환자들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의료 선진국이라는 위상은 재정의 규모가 아니라, 돈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시스템을 갖췄는지에 따라 확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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