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조원 규모의 국내 퇴직연금 시장을 두고 금융권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퇴직연금 시장은 보수적인 색채가 강해 대부분 자금이 은행권으로 몰렸다. 여전히 은행 점유율이 압도적이지만, 최근 높은 수익률과 공격적인 마케팅을 앞세운 증권업계가 은행에 치중된 퇴직연금 자금을 끌어오고 있다. 기존 상품 그대로 다른 금융사로 넘어갈 수 있는 ‘퇴직연금 현물이전’ 제도가 시행되는 10월부터는 퇴직연금 고객 쟁탈전이 더 격화할 전망이다.
3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증권사에 퇴직연금을 맡기는 투자자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을 보면 증권사의 올해 2분기 말 적립금 규모는 작년 2분기와 비교해 18.8% 늘었다. 같은 기간 은행과 보험사의 적립금 증가율은 각각 15.5%, 6.6%로 파악됐다. 직전 분기인 올 1분기와 비교해도 증권사의 적립금 증가율은 3.7%로, 은행(2.4%)보다 높았다.
퇴직연금 적립액만 보면 압도적 선두는 여전히 은행이다. 올해 2분기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액 394조2832억원 가운데 은행 비중은 207조1945억원(약 52.5%)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증권사 비중은 94조512억원(23.8%)으로 은행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보험사 비중은 93조375억원(23.5%)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전통적으로 퇴직연금 투자자는 수익률보다 안정성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다만 증권사의 퇴직연금 수익성이 다른 업권을 웃돌다 보니 증권사 상품을 택하는 투자자가 점점 늘어나는 분위기다. 지난해 기준 증권사의 연간 퇴직연금 수익률은 7.11%다. 은행은 4.87%,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는 각각 4.37%, 4.63%로 증권사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증권사들은 오는 10월 퇴직연금 현물이전 제도 시행을 앞두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고객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간 투자자는 퇴직연금 계좌를 다른 금융사로 이전하려면 계좌에 포함된 투자 상품을 모두 매도해 현금화하거나 만기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익률이 낮아도 처음 가입한 금융사에 묶여 있는 투자자가 많았다.
그런데 퇴직연금 현물이전 제도가 시행되면 퇴직연금 계좌를 기존 포트폴리오 그대로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게 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공격적인 투자 성향의 젊은 세대가 퇴직연금에 관심을 두고, 전 세계적으로도 금리 인하 기조가 뚜렷해지면서 주식을 중심으로 한 실적 배당형 상품 운용에 익숙한 증권사에 투자자 관심이 돌아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증권업계는 연초부터 퇴직연금 현물제도 관련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인프라 개발에 나섰다. 동시에 운용 차별점을 내세워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 증권업계 퇴직연금 1위 사업자인 미래에셋증권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한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다. NH투자증권은 모바일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퇴직연금 고객관리 강화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증권은 개인형 퇴직연금(IRP) 내 관리 수수료를 제외한 ‘다이렉트 IRP’를 선보였다.
퇴직연금 시장을 새로운 먹거리로 보고 신규로 뛰어드는 증권사도 있다. 키움증권은 지난 5월부터 내년 시장 진출을 목표로 퇴직연금 사업 추진 TF를 운영 중이다. 특히 키움증권은 대규모 리테일 고객을 확보한 만큼 IRP 시장에 집중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업계에 ‘집토끼’를 뺏길 처지에 놓인 은행권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하나은행은 연내 상장지수펀드(ETF) 등 상품 수를 기존 대비 2배 늘릴 예정이다. 신한은행은 퇴직연금 관련 애플리케이션(앱)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또 KB국민은행은 개인 맞춤형 운용 전략을 짜주는 자산관리 서비스를 개발 중이고, 우리은행은 금리 경쟁력을 갖춘 상품 수를 늘릴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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