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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개운하다고 느낀 게 몇 년만인지. 진작 수술 받을 걸 그랬다 싶더라고요. ”
올해 초 중앙대병원에서 중증의 심장 대동맥판막 협착으로 진단돼 수술을 받았던 서 모씨(82·여)는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다고 참았던 게 후회스럽다”며 만족감을 보였다. 서 씨는 몇 년 전부터 일상생활 중에도 이따금씩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운 증상을 느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거나 심할 경우 평지를 걸을 때도 숨이 차고 가슴이 뻐근한 증상이 반복돼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입원해 심장초음파 등 각종 검사를 시행한 결과 대동맥 판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장 내부에는 혈액이 지나가는 길에 위치하면서 피가 거꾸로 흐르지 않도록 막아주는 문 역할을 하는 4개의 판막이 존재한다. 서씨의 경우 좌심실에서 대동맥으로 흐르는 혈액의 역류를 막는 대동맥 판막이 노화돼 심하게 좁아진 상태였다. 판막이 열리고 닫히는 기능이 원활치 않으니 심장에서 혈액이 원활히 분출되지 못해 호흡 곤란·가슴 통증·어지러움 등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의료진은 “심장의 기능을 나타내는 척도인 좌심실구축률(LVEF)이 37%에 불과하다”며 “대동맥판막 협착증을 방치하면 심장 내 압력이나 용적이 과부하 되거나 심장근육이 커지는 비후성 심근증, 섬유화되는 심근 섬유증, 흉터가 생기는 심근 반흔형성 등을 초래하거나 심장 확장, 심부전, 급성 심장 돌연사 등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령이라 치료를 주저하는 서씨에게 의료진이 처음 권유한 건 시술적 치료였다. 가슴을 여는 대신 사타구니 쪽 동맥을 통해 풍선이나 시술도관 내부에 장착된 인공판막을 심장까지 넣은 후 펼치는 치료법이다. 흔히 ‘타비(TAVR·Transcatheter Aortic Valve Replacement)’라고 불린다.
중등도 이상의 대동맥판막 협착증은 고령층의 유병률이 높다. 나이가 들수록 심장 판막에 칼슘이 쌓여 두꺼워지고 단단해져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노화로 인한 판막의 퇴행성 변화로 중증의 심장판막 질환을 앓는 환자는 고령화와 함께 급증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3년 대동맥판막 협착증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2만8318명으로 2017년 1만5351명 대비 84.5%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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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맥판막이 중등도 이상으로 좁아져 있을 때 유일한 치료법은 손상된 판막을 제거하고 인공판막을 삽입하는 수술이다. 서씨 같은 고령자는 개흉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다 보니 심장을 멈추지 않아도 되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수면 마취로도 가능한 타비 시술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앙대병원 심장내과와 심장혈관흉부외과·영상의학과·심장전문 마취통증의학과 등 여러 진료과 의료진이 참여하는 다학제 회의 끝에 “시술보다 수술이 적합해 보인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박씨의 경우 폐·콩팥(신장) 등 다른 장기가 비교적 건강해 수술의 위험도가 크지 않고 심장근육에 피를 공급하는 왼쪽 관상동맥이 대동맥 판막륜과 가깝다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자칫 타비 시술 도중 관상동맥이 막힐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박충규 중앙대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은 서씨는 고심 끝에 개흉 수술을 받았다. 딱딱해진 판막을 그대로 둔 채 풍선을 부풀리는 것보다 수술을 통해 완전히 제거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우려와 달리 서씨는 수술 후 경과가 좋아 하루 만에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정상인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던 좌심실 수축기능은 수술 후 50%대로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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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과거와 달리 환자들의 기대수명이 90대 중반에 이른다”며 “다른 장기 기능의 이상 소견이 없다면 80대라고 해서 심장수술의 위험도가 더 크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판막 질환으로 진단된 후 약물치료만 받다가 최적의 수술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학계에서는 심장판막 수술시기가 늦어질수록 장기 생존율이 떨어질 감소될 위험이 크다는 근거 연구가 쌓이고 있다. 올해 초 미국흉부외과 학회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대동맥판막 치환 수술을 받은 평균 74.3세의 환자 4만2586명의 환자를 조사한 결과 수술 후 5년 생존율은 92.9%로 나타났다. 특히 심장기능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동맥판막 치환 수술을 받은 경우 수술 후 8년 생존율이 88.4%에 달했다. 환자의 생존율 향상과 심장기능 보존을 고려한다면 판막 이외 심장 기능과 폐동맥압, 오른쪽 삼첨판막 역류 현상, 우심실 기능 등과 심장의 손상 정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적기에 수술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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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고령 환자가 다른 심장수술을 병행하거나 대동맥 또는 대동맥 판막륜의 석회화가 심한 경우, 호흡기신장 기능 저하 등의 위험인자들이 있는 경우 수술시간을 단축하고 합병증 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속 거치형 또는 무봉합 방식의 대동맥판막 치환 수술을 할 수 있다”며 “고위험군은 수술이 아닌 시술적 치료로 인공판막을 삽입하는 것도 가능한 만큼 단순히 나이 때문에 치료를 미뤄서는 안된다”고 조언했다.
88세에 대동맥판막 협착증으로 내원한 환자에게도 무조건 시술을 권하기 보다 어떤 치료가 가장 나을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게 박 교수의 소신이다. 그는 “고령자도 평소 활동량이나 다양한 위험평가 지표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적합한 치료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며 “좌측 심장 기능이 손상되기 전에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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