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들이 사는 세상
40년간 묻어둔 작품을 다듬어서 탄생한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도시의 그 불확실한 벽’은 출간 되기 전부터 이슈가 됐다. ‘그림자’를 소재로 펼쳐지는 소년의 모험과 두려움을 통해 독자를 낯선 세계로 초대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다름없다. 너에 대해 ‘이건 틀림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 구체적인 정보, 그런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내 손안에 있는 건 네가 직접 너에 대해 말해준 몇 가지 정보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네가 사실로서 말했을 뿐,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136)
“당신은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어 벽 바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그저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153)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야말로 진짜 ‘세계’이며, 운명론을 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어쩌면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 너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할 거라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하지만 소년은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소녀가 사라지자 좀처럼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소통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럴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여 고립되기 쉬운 현대인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 있는 그녀가 그림자고 벽 바깥에 있던 그녀가 본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전부터 그게 마음에 걸려서, 여기 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조각조각 정보를 모아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실은 이곳이 그림자의 나라가 아닐까. 그림자들이 모여 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176)
2부 다시 만난 세계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무겁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직장이란, 그렇다. 도서관 말고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도서관 말고 내가 가야 할 장소는 없다.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235)
여기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우린 현실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한 채 존재를 확인할 길 없는 가상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애타게 찾아 헤맨다.
주인공은 새 직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도서관 말고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장소는 없다는, 좀 더 정확히 말해 도서관만큼 자신에게 적합한 장소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알아챔 뒤에는 꿈의 강력한 후원을 받은 전진이 따른다.
시곗바늘은 언제나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을 쌓아가지만, 나에게 진짜 시간은-마음의 벽에 박힌 시계는-그대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텅 빈 부분을 무언가로 채울 필요가 있기에 주위에 보이는 것으로 그때그때 메워갔을 뿐이다. (254)
누구에게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존재하고, 때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한 시간에 기억이나 의식이 멈추어버린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가기에 공백을 채울 필요가 있는데, 주인공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로 메워갔다고 고백한다.
3부 벽과 그림자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각인. 나는 아마도 그것을 내 존재의 일부로 간직한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667)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684)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앓고 있는 ‘영혼의 역병’은 결국 벽을 만들고, 그 벽 안에서 그림자와 함께 살고 죽는 운명을 던져준다. 하지만 그것은 ‘불확실한 벽’이기 때문에 때론 입구와 출구를 정확히 찾을 수 없거나 그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견고하고 높게만 보였던 벽은 그림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기 안의 타자를 껴안으려는 순간 문이 생기면서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어쩌면 인간은 평생에 걸쳐 잃어버린 순수성을 회복하거나 벽을 만드는 동시에 허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실존의 무게를 아프게 깨닫는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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