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회사가 악재성 공시를 내기 직전에 기관·외국인 등 ‘큰손’이 먼저 팔아 대규모 손실을 피해는 행태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주로 신약 개발 기대감에 주가가 움직이는 바이오 업종에서 나타난다. 큰손들은 리스크 헤지(hedge·위험 회피) 차원에서 물량을 줄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관이 팔 때 홀로 샀다가 피해를 본 개미들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선행매매가 이뤄진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 美 임상 취하 보로노이… 공시 전에 미리 판 큰손
1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닥시장 상장사이자 표적치료제 신약 개발 기업인 보로노이는 지난 15일 장 마감 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제출한 폐암 치료제 후보물질 ‘VRN11′의 미국 임상1a상 계획을 자진 취하했다”고 공시했다.
앞서 보로노이는 지난달 20일 임상 시험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시장이 대형 호재로 인식하면서 당시 4만6550원이던 이 회사 주가는 이달 12일 8만200원까지 72.29% 치솟았다. 약 1개월 만에 전해진 임상 취소 소식은 당연히 주가 급락으로 이어졌다. 공시 후 보로노이는 시간 외 거래에서 종가 대비 9.99% 빠진 7만1200원으로 마감했다. 전날은 전 거래일보다 3800원(4.80%) 하락한 7만5300원에 장을 마쳤다.
그런데 임상 자진 취하 공시가 나오기 전 시장에서는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15일 기타법인(기관 투자자를 제외한 법인)과 연기금은 보로노이 주식을 각각 45억원, 15억원 순매도했다. 외국인도 54억원어치를 팔았다. 이달 들어 12일까지 기타법인은 28억원 순매도였는데 처분 물량을 더 늘렸고, 연기금은 1억원 순매수였는데 ‘팔자’로 돌아선 것이다. 외국인도 1~12일 83억원 순매수에서 15일 54억원 순매도로 180도 방향을 틀었다. 기타법인과 외국인의 15일 순매도액은 최근 1년 사이 가장 큰 규모다.
큰손들이 보로노이 주식을 내다 파는 동안 개인 투자자는 118억원 규모로 사들였다. 개미 사이에서는 공시 정보가 사전에 유출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 투자자는 “공시되기 3시간 전인 15일 오후 1시쯤부터 기관과 외국인이 매도하는 걸 봤다”며 “개인만 저가 매수한다고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봤다”고 했다.
◇ HLB 때도 비슷… “리스크 헤지일 뿐”
큰손들의 ‘미리 탈출’은 거래소 공시가 아닌 악재성 소식 발표에서도 관측된다. 5월 17일 증시 개장 전 진양곤 HLB 회장은 유튜브를 통해 “FDA로부터 개발 중인 간암 신약 심사권에 대한 보완요구서한(CRL)을 받았다”고 밝혔다. 사실상 승인이 불발됐다고 발표한 것이다. 기대감을 안고 급등했던 HLB 주가는 이후 하한가로 직행했다.
그런데 진 회장 발표 전날인 5월 16일 HLB 수급 동향을 보면 기타법인이 34억원, 연기금이 18억원, 외국인이 250억원을 각각 내다 판 것으로 나온다. 직전 거래일에 연기금과 외국인이 각각 6억원, 7억원씩 순매수하고 기타법인의 순매도 규모는 2억원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발표 전날 기타법인과 외국인의 순매도 규모는 직전 7거래일 사이 가장 컸다. 5월 16일 개인은 HLB 주식을 266억원어치 샀다.
악재성 소식이 터지기 전 기관과 외국인의 매도 물량이 늘어나는 것과 관련해 큰손들은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투자하는 기업의 주요 이벤트 결과가 나오기 전 리스크 헤지 차원에서 물량을 푸는 경우가 있는데, 정보를 먼저 입수해 움직이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 공시 올라가는 사이 유출… “알음알음 퍼져”
장 마감 후 나오는 공시는 통상 장 중 한국거래소에 공시 신청을 하고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 그사이 해당 상장사 바깥으로 공시 내용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한 상장사의 공시 담당자는 “오후 2~3시쯤 거래소로 공시안을 보내면 확인 작업을 거쳐 장 마감 후 공시되는 식인데, 어느 단계에선가 정보가 빠져나가 투자자들이 알음알음 먼저 아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미공개 정보 이용(내부자 거래)은 ‘회사의 주요 주주, 임직원 및 기타 회사와 일정한 관계에 있는 자가 공개하지 않은 회사의 중요 정보를 이용해 주식 등을 사고팔거나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제공해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회피한 경우’를 뜻한다. 미공개 정보 이용이 적발되면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해지고, 이익 또는 회피한 손실액의 3배 이상 5배 이하 벌금을 내야 한다. 이익 또는 회피한 손실액이 50억원 이상인 때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투자자가 기업 내부자 등에게서 정보를 습득한 후 거래하면 미공개 중요 정보 이용에 해당한다. 문제는 정보 전달 경로가 불명확할 때가 많고 입증도 어렵다는 점이다. 거래소 시장감시본부는 선행매매 의혹이 있는 종목을 자체 프로세스를 거쳐 점검하고, 외부로는 결과만 공개한다. 거래소 관계자는 이번 보로노이 건과 관련해 “시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특정 종목에 대한 언급은 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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