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멋들어지게 탈출했잖아요.” “잘 도망 다니는 게 멋있어요.” “우리 엄마가 신창원 되게 좋아해요. 위대하대요.”
한국판 ‘쇼생크 탈출’을 몸소 보여주고 신드롬을 일으킨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이 붙잡힌 건 907일 만이다.
1999년 7월 16일 오후 5시 20분쯤 전남 순천시 조례동의 한 아파트에서 검거된 신창원은 “편해요, 그냥”이라는 짧은 심정을 토로한 뒤 체념한 듯 교도소로 향했다.
◇20분씩 쇠창살 자르고 체중 15㎏ 감량했다…탈옥 성공한 무기수
어린 시절부터 강·절도 혐의 등으로 소년원과 교도소 생활을 했던 신창원은 1989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가정집에서 3000여만 원의 금품을 빼앗고 집주인을 흉기로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당초 신창원은 서울구치소를 거쳐 흉악범과 문제수 등을 수용하는 청송교도소에 수감됐다. 5년간 무난한 수감생활을 한 그는 1994년 11월 16일 부산교도소로 이감됐고, 이곳에서 탈옥을 계획했다.
특히 그는 모범수로 지내며 교도관의 눈을 피해 교도소 곳곳을 살피는 등 5년 동안 탈옥을 준비했다. 그가 눈여겨본 장소는 바로 감방 화장실에 있는 환풍구였다.
환풍구에 있는 2개의 쇠창살을 자르기 위해 목공 작업장에서 작은 실톱 하나를 신발 밑창에 넣고 숨겨서 나왔다. 당시 교도소에서는 매일 오후 6~8시에 교화 방송이 나왔다. 신창원은 이 시간을 이용해 하루 20분씩, 두 달간 쇠창살을 자르는 데 집중했다.
다음 난관은 환풍구의 크기였다. 신창원은 가로 32㎝, 세로 28㎝ 환풍구를 빠져나가기 위해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단백질만 먹고 굶다시피 해 두 달간 15㎏을 감량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신창원은 1997년 1월 20일 오전 3시, 통풍구 쇠창살을 떼어내고 탈출했다. 4.5m의 교도소 외벽을 넘기 위해 생각한 묘안은 ‘땅 파기’였다.
당시 교도소 담장 바로 앞에는 교회 건물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창원은 잘라낸 쇠창살로 2시간 동안 땅을 판 뒤 공사장으로 진입했고, 공사장에 있던 밧줄 등을 활용해 콘크리트 담을 넘어 부산교도소를 빠져나갔다.
이후 신창원은 한 농가에서 양복과 구두, 흉기를 훔쳤고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탈옥에 성공했다. 철통 보안을 자랑하던 부산교도소에서 탈출하는 데 불과 1시간 3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스총 맞고 경찰과 혈투…현상금 5000만 원 걸렸다
탈옥한 지 열흘째 되는 날, 신창원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충남 천안에 있던 다방이었다. 여기서 그는 여종업원 전 모 씨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신창원은 전 씨에게 자신이 탈옥수라는 사실을 고백했고, 전 씨는 오히려 신창원을 받아주며 동거를 시작했다. 이웃들은 두 사람을 금실 좋은 신혼부부라고 생각했다고.
특히 전 씨는 신창원이 돈을 훔쳐 오면 물건을 처분하거나 때로는 도둑질에 동행하는 등 공범을 자처했다. 그야말로 악어와 악어새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신창원에게는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경찰이 신창원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997년 10월 18일, 원종렬 당시 경장은 친구로부터 “우리 세차장에 오는 손님이 수상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 경장은 문제의 손님이 신창원이라는 걸 깨닫고 업무 시간 틈틈이 추적에 나섰다.
결국 신창원이 실제 은신했던 집을 찾아내 잠복했고, 도둑질하러 나갔다 온 신창원은 어수선한 상황을 느끼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에 원 경장은 곧바로 신창원에게 가스총을 쐈다.
신창원은 오른쪽 눈 밑과 머리 등 총 2발의 가스총을 정확하게 맞았지만, 얼굴에 흐르는 피를 쓱 닦고 그대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도주한 신창원이 남기고 간 유일한 단서는 동거했던 전 씨다.
전 씨는 경찰에게 “신창원인 줄 몰랐다”고 잡아떼면서 몰래 그와 연락을 이어갔다. 그러다 신창원과 헤어진 전 씨는 증오에 휩싸여 경찰과 함께 있을 때 그를 불러냈다.
신창원은 경찰 두 명의 습격과 주먹질을 끝까지 버텼고, 때마침 경찰의 총이 고장 난 틈을 타 전 씨 차를 타고 다시 도주했다. 신창원이 남기고 간 차에는 범행 도구와 훔친 번호판, 현금 그리고 심경을 적은 일기장 등이 있었다.
그렇게 신창원은 무려 2년 6개월간 전국 4만여㎞의 거리를 이동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빈집 털이로 9억 8000만 원에 달하는 생활비를 마련했고, 훔친 차를 타고 다녔다.
매우 민첩했고 운동신경도 뛰어난 신창원이 코앞에서 마주친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친 것만 6번이었다. 신창원을 잡기 위해 동원된 경찰은 97만 명에 달했다.
그를 놓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경찰관 57명이 파면, 해임, 전보 등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잠복 근무 중이던 형사가 신창원의 동거녀를 성폭행해 파면되고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뿌려진 수배 전단은 463만 장이었고, 경찰에 접수된 신고도 5823건이었다. 신창원이 유명해지면서 현상금은 1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치솟았고, 이는 당시 현상금 사상 최고액이었다.
◇2년 6개월 만 재검거…경찰 꿈꾸던 수리기사의 ‘눈썰미’
신창원이 탈옥한 지 907일째 되던 1999년 7월 16일, 서울경찰청 112상황실에 “신창원과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한 통의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의 주인공은 가스 수리기사인 김 모 씨였다. 육군 정보부대 부사관 출신으로 눈썰미가 남달랐던 김 씨는 AS 신청을 받고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 방문했다가 수상함을 느꼈다.
집에는 그 흔한 결혼사진이 한 장도 없었고 운동 기구들이 많았다고. 특히 집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집에서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모습에 의심이 커졌다고 한다.
이어 김 씨는 부동산을 찾아가 여성 명의로 계약된 아파트에다가 계약한 다음 날 바로 이사 온 점을 확인하고 해당 남성이 신창원이라고 확신했다.
알고 보니 신창원은 한 카페 종업원 여성과 동거하면서 결혼을 약속, 해당 아파트에 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이날 오후 3시 30분쯤 김 씨의 신고에 총기로 무장한 경찰 46명이 아파트를 포위하고 퇴로를 막았다. 그는 “제가 신창원입니다”라는 한 마디와 함께 2년 6개월여의 탈주극을 끝냈다.
신창원이 검거된 이후에도 신드롬은 계속됐다. 특히 검거 당시 그가 입었던 화려한 패턴의 티셔츠는 카피 돼 이른바 ‘신창원 티셔츠’로 시장 등에서 판매됐으며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범죄자 최초로 인터넷 팬카페도 개설됐으며 신창원 탈옥을 소재로 한 PC 게임과 보드게임도 유행했다.
신창원에게는 143건의 죄목이 적용됐고 기존 무기징역에 징역 22년 6개월이 추가됐다. 이어 흉악범을 가둬두는 경북북부교도소로 이감돼 독방에 수감됐다.
신고자였던 김 씨는 포상금 5000만 원과 더불어 꿈이었던 경찰에 특채됐으며 현재도 경찰로 근무 중이다.
◇”속죄하며 살겠다”…독방서 극단 선택 시도도
신창원의 일기장에는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줬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XX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 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적혀 있었다.
또 신창원은 재검거 당시 “저 같은 범죄자가 다시는 없게, 사회와 가정에서 문제아들에게 사랑을 주십시오”라고 강조했다.
그는 재수감 이후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으며 “같은 처지에 있는 재소자들의 심리를 상담해 주고 싶다”며 심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2011년 8월에는 감방에서 목을 매어 극단 선택을 시도했다. 당시 교도소 측은 “아버지가 한 달 전 세상을 떠나자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후 다만 문성호 자치경찰연구소장은 신창원에게 받은 편지를 공개하며 극단 선택의 이유가 장기수에 대한 절망적인 수용 실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편지에서 신창원은 “저는 22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이 중 12년 3개월은 엄중 격리된 환경에서 악몽, 환상, 환청, 불안, 폐소 공포증, 우울장애, 불면 등을 겪었고 현재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며 “10년 3개월 동안 징벌 1회 받은 적이 없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도주를 기도한 적이 없는데 제가 왜 10년 5개월째 독방에 격리돼 있고, 왜 수갑을 차고 다녀야 하며 TV 시청을 금지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동시에 “제가 위험한 행동을 보였다면 모를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중경비시설에 수용되었으니 같은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헌법과 법의 취지에 위반되는 것 같아 이 문제에 대해서도 조취를 취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제가 지금의 환경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신창원은 2019년 5월 “독방 생활과 CCTV 감시가 계속되는 것은 부당하다. 1997년 도주, 2011년 자살 기도를 한 사실이 있으나 이후 징벌 없이 모범적으로 생활하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법무부가 인권위 개선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광주교도소는 2020년 5월 신창원이 수감된 독방의 감시용 CCTV를 철거했다.
같은 해 10월 신창원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측에서 보낸 편지에 답장하기도 했다. 그는 “사형도 부족한 중죄를 지은 죄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모두 자기변명에 불과할 뿐이지요. 저는 그저 이곳에서 조용히 속죄하며 남은 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2023년 5월에는 대전교도소 내 감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당직을 서던 교도소 직원에게 발견돼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응급 치료를 마치고 다시 교도소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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