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회사에서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하는 게 인생 최대 과제였는데 요즘은 ‘얇고 길게’ 정년까지 다니자는 마음밖에 없어요.”
# 대기업에 재직 중인 40대 A차장은 부장 진급이 달갑지 않다. 승진 후 연봉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업무는 배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져 부담은 더 커진다. 임원 승진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퇴직금을 모아 자영업에 뛰어들까 생각했지만 불황에 고민을 접었다. 결국 정년까지 회사에서 월급을 주는 만큼만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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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 꼭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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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연봉과 승진보다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추구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직장인의 별이라고 불렸던 임원의 입지도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늘고 길게’ 정년까지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승진을 거부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HD현대중공업 노조는 올해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에 승진거부권을 포함했다. 생산직의 경우 기장에서 기감 이상으로, 사무직은 선임에서 책임 이상으로 승진하면 노조에서 자동 탈퇴하게 되는데 이때 승진을 거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다.
노조가 승진 거부권을 요구하는 것은 비조합원 전환과 임금체계 변경에 따른 부담 때문이다. 직원들은 일정 직급 이상 승진 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합에서 나와야 해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연봉 체계가 근속 기간에 따라 임금이 높아지는 ‘호봉제’에서 성과를 기준으로 협상하는 ‘연봉제’로 전환되는 것도 부담 요인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을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임원 승진을 포기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잡코리아가 MZ세대(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 직장인 1114명을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54.8%가 ‘임원 승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부담스러워서’라는 응답이 43.6%로 가장 높았다. ‘임원 승진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서’라는 응답은 20%, ‘임원은 워라밸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는 13.3%로 뒤를 이었다.
대형 유통기업에 재직 중인 20대 B씨는 “밤낮없이 일하는 상사들을 보고 ‘나는 저렇게는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며 “워라밸을 포기할 만큼 회사가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어서 승진에 큰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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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임원, 연봉 동결에 주 7일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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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별로 꼽히던 임원의 위상도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복리후생은 축소되는 반면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은 커지고 있어서다.
삼성그룹은 지난 4월부터 전 계열사 대상 임원 주 6일 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부사장에게 지원하는 업무용 차를 ‘제네시스 G90’에서 한 단계 낮은 ‘G80’으로 변경했다. 고문 등 퇴직을 앞둔 고위 임원을 예우하는 기간도 축소했다. 삼성전자의 네트워크 사업부는 임원 출장 시 비즈니스석이 아닌 이코노미석을 이용하도록 했다. 숙소 역시 평사원과 동급으로 하향했다.
대대적인 사업 재편을 추진 중인 SK그룹도 지난 2월부터 24년 만에 ‘토요일 사장단 회의’를 부활시키며 사실상 주 6일 근무에 돌입했다. 올해 말 모든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의 경영 성과를 평가해 임기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10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SK온은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임원 법인카드 한도를 줄였다. 흑자 달성 전까지 임원 연봉을 동결하기로 했으며 현재 시행 중인 해외 출장 이코노미석 탑승 의무화, 오전 7시 출근도 지속하기로 했다.
철강업계 최초로 격주 주 4일제 근무를 시행한 포스코그룹은 지난달 임원 근무를 ‘주 5일제’로 복구했다. 임원 급여는 4월부터 10~20% 반납하기로 했으며 주식 보상 제도(스톡그랜트)도 폐지했다.
재계 관계자는 “임원을 달고 싶어 하는 직원들은 여전히 있지만 이른 승진은 은퇴를 앞당길 뿐이라는 이유로 진급을 달가워하지 않는 직원들도 많다”며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임원 대신 부장, 차장으로 워라밸을 즐기면서 정년까지 다니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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