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감사인으로 지정된 회계법인의 불성실한 감사로 인해 코스닥 상장법인이 불성실공시 법인 지정 예고 대상으로 지목되는 일이 벌어졌다. 유리기판용 검사장비 등 신사업에 대한 기대와 성공적인 벤처투자 성과로 상승세를 보이던 기업 주가도 급락했다. 지정감사인에 대한 기업의 불신이 끊이지 않고 있다.
1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업체 HB테크놀러지는 삼일회계법인을 올해 외부감사인으로 선임했다. 지난해를 끝으로 동현회계법인과 지정감사인 감사용역 계약이 종료된데 따른 것이다.
HB테크놀러지는 지난해 사업보고서 작성 막바지에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으로 잡았던 ‘HB반도체세컨더리투자조합’ 처분 이익을 영업외손익으로 수정해야 했다. 당초 309억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은 적자전환했고, 매출 역시 24.6% 줄어든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 외부감사를 맡은 동현회계법인이 갑작스레 심리 과정에서 계정을 재분류하도록 한 까닭이다.
이에 따라 사업보고서 확정 이전 손익구조 30% 이상 변경을 공시한 HB테크놀러지는 거래소로부터 내부결산 대비 감사보고서 수치차이 과다로 불성실공시 법인 지정 예고 조치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지정 예고 공시 전날 25.86% 상승했던 주가는 공시와 함께 12.64%가 빠졌다. 외부감사인의 갑작스러운 기준 변경으로 인해 불가피했다는 회사 측 해명에도 주가 하락은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
HB테크놀러지는 2021년 자회사인 벤처캐피털(VC) HB인베스트먼트를 업무집행조합원(GP)으로 하는 벤처투자조합에 160억원을 출자했다. 조합은 반도체 제조회사 HSCP의 구주를 사들였고, HSCP는 2022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며 지난해 조합 최대 출자자인 HB테크놀러지에 대규모 회수 차익을 남겼다.
문제는 조합 출자부터 회수까지 모두 지정감사인이 외부감사를 맡았던 기간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조합 출자 당시에는 문제가 없던 사안이 마지막 해가 돼서야 불거졌다. HB테크놀러지 관계자는 “반기·분기보고서 작성 당시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던 내용을 심리 과정에서 발견했다며 정정을 요구했다”면서 “다른 회계법인으로부터도 검토를 받았지만, 감사의견을 받기 위해서는 감사인 의견을 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벤처펀드 관련 회계에 정통한 한 회계사는 “HB테크놀러지가 투자를 주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아닌 만큼 투자 회수에 따른 이익을 영업이익이 아닌 순이익으로 보는 것이 맞는 회계”라면서도 “사전에 충분히 검토할 기회가 있음에도 살피지 않고 막바지에야 계정을 재분류한 것은 회계법인에도 귀책이 있다”고 봤다.
상장기업들은 지정감사제 도입 안팎으로 회계법인의 불성실한 감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불만이다. 상장사협의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280여개 상장사 가운데 42.6%는 ‘지정감사인의 초도감사 시 기업과 산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비효율 발생’한다고 답했다. 지정감사인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답한 비율은 14.2%, 과거 회계처리에 대한 충분한 근거없이 불인정한다는 응답도 16.3%에 이른다.
재계 관계자는 “지정감사인으로 지정된 중소형 회계법인의 감사 품질이 대형 회계법인 대비 상당히 떨어진다는 사실은 업계 전반이 체감하고 있는 분위기”라면서 “늘어난 감사 비용에 걸맞게 높은 수준의 감사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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