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홍명보 신임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55)은 선수 시절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월드컵 기간 때보다 인상적이었던 홍 감독의 모습은 따로 있다. 2002년 월드컵 개막 닷새 전 열린 한국과 프랑스 국가대표 간 평가전이었다. 주장 완장을 차고 있던 홍 감독은 경기 시작 전 선수들과 도열한 상태에서 프랑스 주장 지네딘 지단과 악수했다.
지단은 당시 최고의 슈퍼스타였고 카리스마를 뽐내는 선수였다. 그런 지단과 마주한 홍 감독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고 오라(aura)를 풍겼다. 오라란 20세기 초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미학 개념으로, 예술 작품 원본의 ‘고유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뜻한다. 요즘엔 더 넓은 개념으로 쓰인다. ‘스포츠스타와 연예인, 정치인은 실제로 보면 오라를 풍긴다’는 식이다. 지단과 악수하던 홍 감독의 오라는 ‘밈'(meme·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이미지나 표현)으로 확산해 꽤나 화제가 됐었다.
감독이 된 후에도 홍명보는 그런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2022년 4월 프로축구팀 울산현대의 감독이었던 그는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게 팀이야”고 호통 쳤다. 바닥에 있는 의자도 발로 걷어차며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인 조호르 다룰 탁짐(말레이시아)전에서 1-2로 패한 직후였다. 홍 감독은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아무것도 아닌데 넘어지고 파울을 얻으려 했다”며 “어린 선수들이 그런 것을 배우면 미래가 밝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게 팀이야”는 요즘 MZ세대가 기피하는 꼰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도 젊은 세대는 홍 감독의 호통에 흥미를 느끼고 열광했다. 꼰대가 아닌 ‘카리스마’로 느껴지게 하는 그만의 오라가 있었고, 무엇보다 바른 말을 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게 팀이야” 호통도 밈으로 퍼져 홍 감독을 바라보는 MZ세대의 호감도를 높였다.
홍 감독에 관한 또 다른 결정적 장면은 지난해 1월 11일에 나왔다. 울산 현대 감독이었던 그는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만난 일본인 선수 중 최악”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직격 대상은 일본인 선수 아마노 준이었다.
아마노는 직전 시즌까지 울산에서 뛰었지만 약속을 어기고 전북 현대로 이적했다는 것이 홍 감독의 주장이었다. “처음에 저(홍명보)와 얘기할 때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은 돈 때문에 전북 현대로 이적했다. 거짓말을 하고 전북으로 간 셈이다.”
기자회견에서 특정 선수를 저격하는 것은 한국 스포츠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홍명보니까, 우호적인 여론이 우세했다. 무뚝뚝하지만 카리스마 있고, 달변은 아니지만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홍 감독의 오라에 힘입은 것이었다.
홍 감독 특유의 그런 분위기는 최근 들어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말을 바꿔 축구협회의 한국 국가대표 감독직 제안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울산 현대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그는 지난달 30일만 해도 “우리 팬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감독직 수락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 후 감독직을 받아들인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었다. 홍 감독은 “이제 저는 없습니다. (제 안에는)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아무리 결기를 보인다고 해도 그만의 고유한 분위기는 사라진 상태. 공직사회 정치권 체육계 법조계 산업계 가릴 것 없이 반복되는 고위층들의 말 바꾸기 행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중은 지겹도록 봐온 어른들의 실망스러운 ‘내로남불’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홍명보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실패한 경험이 있다. 실패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실패하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학습을 한다. 이 때문에 미국 항공 우주국 나사(NASA)는 실패한 팀원들에게 기회를 다시 준다고 한다. 13일 공식 선임된 홍 감독이 명성을 되찾는 길은 월드컵 실패를 자산으로 성공의 결과로 내는 것이다. 이제는 ‘오라’가 아닌 ‘실력’으로 승부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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