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디폴트옵션에서도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적립금 90%가 몰려있는 점을 고려하면 성과 평가가 무색한 상황이다.”
강성호 보험연구원 고령화센터장은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 1년 성과를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12일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이 시행 1년을 맞았다.
디폴트옵션은 정부가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위해 내놓은 핵심 정책이다. 2022년 7월 시범운영 기간을 거쳐 2023년 7월12일 본격 시행됐다.
하지만 현재까지 시장 안착과 투자활성화 역할 모두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을 보면 1분기 말 기준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25조6460억 원으로 집계된다. 2023년 말과 비교해 104%(13조 원) 증가하면서 3개월 만에 두 배 규모로 커졌다. 디폴트옵션을 지정한 가입자 수는 526만9655명에 이른다.
얼핏 보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규모와 비교하면 안착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1분기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385조7521억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회사에서 직접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확정급여(DB)형을 제외하고 디폴트옵션이 반영되는 확정기여(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 적립금은 184조1936억 원이다.
DC형 적립금이 100조4653억 원, IRP 적립금은 83조7283억 원 등이다.
결국 전체 DC형’IRP시장에서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비중은 13.9%에 그치는 수준이다.
정부는 2023년 7월12일 디폴트옵션을 본격 시행하기에 앞서 1년 동안 DC형 퇴직연금 제도 운영 사업자의 76%, 약 22만4천 곳의 규약 변경을 완료하는 등 제도 조기 안착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디폴트옵션 활성화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디폴트옵션 상품의 실제 운용률은 더욱 낮다.
1분기 기준 디폴트옵션 상품을 지정한 가입자 수는 약 526만 명이지만 디폴트옵션 운용 가입자 수는 234만57명(44.4%)으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디폴트옵션 상품을 지정만 하고 실제로는 그 상품으로 운용하지 않는 가입자가 훨씬 많다는 뜻이다.
운용 가입자는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고 있는 가입자를 의미한다.
국내 디폴트옵션은 더욱 근본적 문제도 안고 있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적립금의 대부분이 1~3%대 낮은 수익률의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잠들어 있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됐다.
‘디폴트(default)’가 응용 프로그램에서 사용자가 특별히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적용하는 초기 값을 뜻하는 것처럼 근로자가 따로 퇴직연금을 금융상품에 투자하도록 설정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운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사전지정운용제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단 근로자가 사전에 운용상품을 지정해야 한다. 시작부터 진정한 의미의 디폴트옵션이 아니다.
게다가 디폴트옵션 상품에 기존 은행의 예금과 같은 원리금보장형이 포함됐다.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나라 가운데 일본을 제외하면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제공하는 곳은 없다.
이렇다보니 한국은 1분기 기준 디폴트옵션에서도 원리보장형 초저위험 상품에 적립금의 89.5%, 약 90%가 몰려있다. 디폴트옵션을 지정해도 근로자가 투자상품보다 안정적 상품을 선택하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현재 판매되는 디폴트옵션 초저위험 상품들의 1년 평균 수익률은 3.28%다. 전체 퇴직연금시장에서 DC형 원리금보장형 상품 수익률인 3~4%와 다를 게 없다.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취지에 맞게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운용되는 적립금은 10% 남짓이다.
디폴트옵션 안에서도 적립금이 수익률 3%대 원리금보장형에 묶여 있는 셈이니 디폴트옵션 제도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바라본다.
강성호 센터장은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이 원리금보장형에 쏠리는 것을 탈피하기 위해 도입했는데 현재 제도에서는 원래 목적과 취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원리금보장형 상품보다 실적배당형 중심의 운용 구조, 자본시장의 개선 등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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