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관, 한화에너지 통해 간접적으로 ㈜한화 지배력 확대
정기선, HD현대 주식매입→배당확대→주식매입 실탄 확보 ‘선순환’
재계 서열 7‧8위 기업집단의 차기 총수 자리를 예약해 놓은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의 경영승계를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각각 83년, 82년생으로 같은 연배라는 점에서 종종 비교 대상이 돼 온 둘은 비슷한 시기에 그룹의 핵심 포지션에 배치되며 경영수업을 쌓았고, 최근 지주사 지분 확대를 통한 그룹 지배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시점도 어느 정도 일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김동관 부회장과 정기선 부회장은 권한과 역할 측면에서는 이미 그룹 내에서 총수에 버금가는 입지를 구축해놓고 있다.
김 부회장의 경우 지난 2022년 부회장 승진과 함께 그룹 지주사인 ㈜한화를 비롯, 주력 계열사인 한화솔루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전략부문 대표이사를 겸직하며 에너지‧화학‧방산‧항공우주 등 그룹의 핵심 사업들을 장악했다.
지난해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인수 이후에는 이사진에 합류하는 한편, 최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그룹의 신사업인 조선‧해양으로까지 경영 보폭을 넓혔다. 한화오션 인수의 주체가 김 부회장이 이끄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방산 계열사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애초에 인수작업 자체를 김 부회장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너 일가 내에서의 승계 구도도 사실상 확정됐다. 장남인 김 부회장이 그룹의 핵심 사업들을 가져가고 차남 김동원 사장은 생명‧증권 등 금융을, 삼남 김동선 부사장은 레저‧유통‧로보틱스를 챙기는 그림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 3~4월 세 아들을 각각 대동하고 각자가 이끄는 사업장을 방문하며 이런 승계 구도를 공식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향후 계열분리가 이뤄지더라도 한화그룹의 본류(本流)는 김 부회장이 맡게 될 것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셈이다.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은 그룹 지주사 대표이사를 맡으며 그룹 총수에 준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최측근인 권오갑 회장이 그룹의 최정점에 있긴 하지만, 그룹을 대표하는 ‘얼굴’ 역할은 정 부회장이 도맡아 하고 있다.
기업 총수들이 참석하는 국내 주요 행사는 물론, 대통령 해외순방에 함께하는 경제사절단에도 정 부회장이 나서고 있고,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유력 인사들도 정 부회장이 맞이한다. HD현대중공업이 선주와 대규모 계약을 체결할 때도 직접 나서는 등 주력 계열사들도 직접 챙긴다.
올해 초 열린 ‘CES 2024’에서는 기조연설자로 나서 ‘사이트 트랜스포메이션’을 바탕으로 한 인프라 건설의 종합적인 혁신전략과 비전을 알리기도 했다.
권 회장은 정 부회장이 그룹을 안정적으로 이끌도록 돕고, 때로 정몽준 이사장의 의중을 반영하며 내부 살림을 챙기는, 일종의 ‘과도기적 안전판’ 역할로 보여진다. 시기가 문제일 뿐 정 부회장의 대관식은 예정된 수순인 셈이다.
지주사 지분확보 방식 서로 달라…김동관 '속도', 정기선 '정공법'
하지만 김동관 부회장이나 정기선 부회장 모두 완전한 경영 승계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룹 지주회사 지분 확대를 통한 지배력이 뒷받침돼야 대관식을 치를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한화그룹과 HD현대그룹의 동일인은 여전히 김승연 회장과 정몽준 이사장이다.
두 차기 총수의 지분확보 방식은 큰 차이가 있다. 일단 속도 면에서는 김 부회장이 월등하다. 한화그룹 경영승계의 핵심은 한화에너지다. 김 부회장이 50%, 그리고 두 동생인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과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각각 25%씩 지분을 보유한 100% 오너 소유 기업이다.
한화에너지는 지난 4일 이사회를 열고 한화그룹 지주사인 ㈜한화 보통주 600만주(지분율 8.0%)를 주당 3만원에 공개 매수하기로 결정했다. 예정 물량을 모두 매수하면 한화에너지가 보유한 ㈜한화 지분은 기존 9.7%에서 17.7%까지 늘어난다. ㈜한화 최대주주인 김승연 회장(22.7%)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지분율이다.
세 형제가 현재 이끌고 있는 각 사업회사들을 중심으로 향후 그룹 계열분리가 이뤄질 경우 지분구조는 좀 더 복잡해지겠지만, 한화에너지를 통해 확보하게 되는 17.7%의 지주사 지분은 김동관 부회장이 에너지‧화학‧방산‧항공우주‧조선해양 중심의 새 한화그룹 지배력을 확보하는 데 큰 밑천이 될 수 있다.
김 부회장은 그밖에도 직접적으로 ㈜한화 지분 4.91%를 보유하고 있어, 김승연 회장으로부터 일부 지분을 물려받을 경우 상속세 부담을 감안하더라도 큰 무리 없이 그룹의 총수 자리를 승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은 2018년 부친으로부터 증여받은 3040억원을 종자돈으로 HD현대(당시 현대로보틱스) 지분 일부를 사들인 뒤 지분율을 조금씩 확대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그는 증여세 납부 부담에서 벗어난 올해부터 주주배당금과 연봉을 통해 확보된 자금을 HD현대 주식 매입에 쏟아 붓고 있다. 지난 5월 초부터 이달 10일까지 두달여 간 도합 400억원어치의 주식을 사들였다. 이를 통해 1분기 말 5.26%였던 정 부회장의 HD현대 지분율은 마지막 매입일인 10일 기준 6.04%로, 0.78%p 높아졌다.
HD현대의 고배당 정책은 정 부회장의 경영승계 작업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상장 당시 배당 성향 70%이상(별도 순이익 대비)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한 이후, 그 수준을 뛰어넘는 배당을 실시해 왔다. 심지어 총 배당금 규모가 별도 순이익을 넘어선 사례(2020년, 2022년)도 있었다. 2021년 이후 3년 연속 배당금 3000억원을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3886억원을 배당했다.
HD현대로부터 받은 배당금으로 HD현대 주식을 매입하고, 그렇게 확대된 지분을 바탕으로 더 많은 배당금을 받아 더 빠르게 지분율을 확대하는 ‘선순환’이 정 부회장의 경영승계 전략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를 통해 일정 지분율을 확보해 놓으면 부친인 정몽준 이사장이 보유한 HD현대 지분 26.6% 중 일부를 상속받아도 상속세 부담을 덜 수 있다.
형제간 경영권 다툼 등 잡음 가능성 희박
오너 기업들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큰 리스크 중 하나는 형제간 상속분쟁, 그리고 경영권 다툼이다. 최근 사례만 봐도 LG그룹과 한진그룹에서 상속 분쟁과 경영권 다툼이 벌어진 바 있다.
한화그룹과 HD현대그룹은 이런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것으로 보인다. 한화그룹의 경우 이미 김승연 회장 주도로 3형제간 사업회사 배분을 통한 계열분리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라 분쟁의 여지가 적다.
아직 현직에 있으면서 ㈜한화 지분 22.7%를 보유한 김 회장이 세 형제가 한화에너지를 통해 간접 보유한 ㈜한화 지분을 바탕으로 순탄하게 계열분리가 이뤄지도록 조정자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그룹의 경우 정몽준 이사장 슬하에 4남매가 있지만, 정기선 부회장 외에는 HD현대 지분을 보유하거나 경영에 관여하고 있는 이가 없다. 장녀 정남이 씨가 HD현대 지분 0.49%를 보유한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로 있는 정도다. 차남 정예선 씨는 올해 초 KB증권 ESG리서치팀에 입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이사장 재산의 대부분이 HD현대 지분인 만큼, 향후 상속을 통해 4남매가 지분을 나눌 수는 있겠지만 이미 6% 이상의 지분을 가진 정기선 부회장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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