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호흡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여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체내에 산소의 균형을 유지하는 체계가 있다. 활성산소가 과도하면 항산화물질이 작용해 넘치는 양을 제거한다. 우리 몸에서 항산화물질은 유지보수 체계를 가동하는 스위치 같은 기능을 한다. 항산화물질이 Nrf2로 알려진 세포를 자극하면 Nrf2는 대부분 세포 보호 기능을 수행하는 500개 이상의 유전자를 작동한다. 사람에게만 Nrf2 같은 방어기제의 일종인 방아쇠가 있을 리는 없다. 식물에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게 합리적이다. 실제로 식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폴리페놀 같은 물질을 증가시켜 대응하는데, 이러한 물질은 식물뿐 아니라 섭취한 인간 건강에도 유익하다.
■고통은 더 성숙한 열매를 준다지만=수백 건의 유기농 연구에서 ‘고통의 효과’가 확인된다. 생산량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기존 방식과 다른 유기농 과일과 채소에서 살충제 잔유물이 적은 건 당연하겠지만 흥미롭게도 항산화물질을 20~40% 더 많이 함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맛도 더 좋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해밀턴에서 사과 농사를 하는 그린먼이란 농부가 2014년에 행한 비공식적 실험에서는, 같은 나무에서도 상처가 있는 사과가 상처가 없는 사과에 비해 당도가 2~5% 높았다. 이러한 사실은 나무가 해충 자외선 등 외부 환경에 맞서 싸워 자신을 지켜낸 성공의 징표로 보인다.
과거 누군가 제주도에서 재배한 감귤을 가져다주었는데 작고 못생겼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가족 먹으려고 농약 안 치고 저절로 자라게 내버려 둔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달았다. 꽃길만 걸은 사람에 비해 온갖 어려움을 겪고 성공한 사람에게서 더 인간다운 향기가 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유기농이 아닌 일반 농법에서 생산된 못난이 과일과 채소는 어떨까. 판매 및 유통용 과일과 채소는 철저하게 외모지상주의의 지배를 받는다. 영양과 당도가 아니라 모양이 우선이다. 물류 효율을 높이고 유통 비용을 줄이고자 하는 물류 표준화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름 오이의 일종인 ‘가시계 오이’는 구부러진 정도가 2㎝ 이내면 특, 4㎝ 이내면 상, 특과 상에 미달하면 보통 등급을 받는다. 농산물 표준규격에 따라 적잖은 농산물이 ‘등급 외’ 판정을 받게 되고 ‘등급 외’ 농산물은 정상적인 유통경로에서 배제되어 폐기되거나 헐값에 팔린다. 못생겼다고 맛에 차이가 있는 건 아닌데도 말이다.
2020년 8월 24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총 27개 농산물생산량에서 ‘등급 외’ 발생 비중은 평균 11.8%였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전국 128개 산지 농협에 설문조사한 결과로, 정부가 등급 외 발생 현황을 조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품목별로는 당근 19.6%, 무 19%, 배추 17%, 깻잎 16%, 양파 12.6%, 대파 11.8%, 마늘 10.4%, 풋고추 10.2% 등에서 ‘등급 외’가 높았다. 과일류에서는 배 27%, 복숭아 26%, 포도 21.8%, 사과 14.1%로 과일류의 평균이 22.2%로 채소류보다 높았다.
실제 ‘등급 외’ 발생률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양파를 예로 들면 농협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의 선별 과정에서 ‘등급 외’가 20%가량인데, 농민이 아예 APC에 넘기지 않는 ‘등급 외’가 수확량의 20%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산지에서 농민이 스스로 판정한 ‘등급 외’는 판매경로를 찾지 못하거나 유통비용 등의 이유로 그대로 밭에 버려질 때가 많다.
세계 전체 상황이 비슷했다. 2019년 유엔환경계획(UNEP)의 ‘식량 위기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식량의 약 14%가 수확 후 판매되지 못하고 낭비된다. 2021년 UNEP의 ‘식품 폐기물 지수 보고서’에서는 소비되지 못하는 식량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8~10%를 차지하여 기후와 가뭄, 홍수와 같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2021년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음식물 쓰레기 환경영향에 관한 보고서는 매년 미국 식량의 손실과 폐기물이 1억7000만t(톤)에 해당하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추산했다. 유엔은 식품 폐기물이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생태계를 악화하는 부정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하나로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을 포함했다.
세계 한쪽에서는 굶주리지만, 다른 쪽에서는 많게는 생산된 농산물의 절반가량이 판매 전후에, 팔리지 않아서 혹은 음식쓰레기로 버려지고 낭비된다.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생산 및 유통 체계의 극명한 비효율인 셈이다.
■과일과 채소의 외모지상주의 극복=식량 손실과 폐기물의 감소는 여러모로 긍정적이며 특히 지구에 미치는 부하를 줄이는 데에 기여한다. 이러한 목표 아래 자본주의 농산물 유통방식의 개선을 지향하며 등장한 것이 ‘푸드 리퍼브(Food Refurb)’이다. ‘푸드 리퍼브’는 음식을 뜻하는 푸드(Food)와 재공급품을 뜻하는 리퍼브(Refurb)의 합성어. 리퍼브(Refurb)는 ‘새로 꾸민다’는 의미의 ‘리퍼비시(Refurbish)’의 준말로 공장에서 출고될 때 흠이 있거나 반품된 제품, 전시상품 등을 다시 손질해 싼값에 되파는 제품을 뜻하는 유통업계 용어. 대체로 가전제품 가운데 신품과 중고의 중간 제품 정도로 인식된다. ‘푸드 리퍼브’는 겉모습 때문에 소비자에게 닿지 못하고 버려지는 농산물을 주로 유통업체에서 구매해 상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을 말한다. 리퍼브와 마찬가지로 가격이 낮게 책정된다. ‘푸드 리퍼브’는 ‘푸드 뱅크’ 등과 달리 시장 내의 새로운 시도이다. ‘푸드 리퍼브’는 해외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슈퍼마켓 엥테르마르셰(Intermarche)에서 2014년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캠페인을 통해 “못생긴 당근, 수프에 들어가면 상관없잖아?”라는 슬로건으로 못난이 당근을 판매한 것이 ‘푸드 리퍼브’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가격은 시세보다 30~50% 낮게 결정됐다. 이후로 ‘푸드 리퍼브’ 시장은 다양한 채소와 과일, 더 많은 나라로 확대되었고, 화장품 업계와 같은 비식품 시장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네덜란드 크롬코마(Kromkommer, ‘휘어진 오이’라는 뜻)는 낭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못난이 농산물을 활용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2014년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못난이 농산물로 수프를 만들었고, 2020년엔 못난이 농산물 인식 개선을 위하여 이상한 형태의 과일과 채소 모양의 장난감을 개발했다.
미국에서 월마트, 크로커 등 대형 유통업체가 적극적으로 ‘푸드 리퍼드’에 뛰어들어 못난이 농산물을 30~50% 저렴하게 팔아 소비자의 호응을 얻었다. 영국에서는 못난이 농산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소비자가 느낀 만큼의 가치를 음식값을 내게 하는 ‘더 리얼 정크 푸드 프로젝트(The Real Junk Food Project)’ 식당이 등장했다. 덴마크 시민단체 ‘단처지에이드’가 직접 운영하는 슈퍼마켓 ‘위푸드’에서는 못난이 식품을 30~50% 저렴하게 판매하고 수익을 저소득층 지원에 사용해 주목받았다. 시장방식과 비시장방식의 창의적 혼용인 셈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풀 하비스트(Full Harvest)’는 음식물 쓰레기 제로를 표방하며 못생긴 농산물을 식료품 제조업자에게 연결해주는 B2B 사업을 진행한다. 농가는 못난이 농산물을 판매하여 수입을 올리고 식료품 제조업자는 온라인에서 싼 가격에 원료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앞서 서울신문 보도 사례에서 본 것과 같은, 수확 후 그대로 밭에다 갈아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다.
■국내의 ‘푸드 리퍼브’=국내에서는 더본코리아 백종원 대표와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이 협업한 2019년 ‘못난이 감자’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푸드 리퍼브’ 사례로 기억된다. 마땅한 판로를 찾지 못한 못난이 감자 30t을 기존 감자보다 싸게 900g당 780원으로 팔았다. ‘풀 하비스트’와 비슷한 개념으로, 못난이 농산물을 생산한 농가와 식품 가공업체를 연결해주는 ‘파머스페이스’와 같은 사업이 등장했다.
못난이 농산물 정기 구독 서비스 ‘어글리어스’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21년 서비스를 시작한 후 3년 만에 누적 가입자 23만명, 누적 매출액 100억원을 달성했고, 재구매율이 88%에 달한다.
화장품업계가 ‘푸드 리퍼브’에 관심이 많다. 농산물을 직접 보여주는 게 아니라 원료를 사용하는 것인 만큼 사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11월 ‘어글리 러블리’ 브랜드를 시작했다. 농가에서 버려질 뻔한 못난이 농산물에서 원료를 추출해 화장품을 만들었다. 현재 올리브영 온라인몰, 더현대 오프라인 매장 등에서 팔고 있고, 동아시아 7개국에도 진출했다. LG생활건강에 앞서 어글리시크는 전북 무주의 유기농 못난이 사과를 활용하여 만든 저자극 여성 청결제와 제주도의 유기농 브로콜리를 활용한 자외선 차단제를 선보였다.
TV홈쇼핑에 자주 등장한다. 흠이 있는 사과를 일컫는 ‘보조개 사과’가 제일 유명하고, ‘못난이 참외’ 외에 배, 명란, 굴비 등 모양 빠지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성황리에 판매됐다.
2007년 8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서울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주요 일간지 편집국장 10여 명과 저녁을 하며 “‘특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고를 때 덜 예쁜 여자를 골라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인생의 지혜”라며 “덜 예쁜 여자” 운운했는데, 만일 그때 ‘푸드 리퍼브’를 논했으면 자신이나 국민이나 더 행복해지는 진짜 지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14년에 ‘푸드 리퍼브’란 말이 돌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 지도자에게 세계보다 7년쯤 앞서가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푸드 리퍼브’의 정착과 확산을 기대한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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