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사 아닌 학폭위…“‘관계 회복 프로그램’ 등 알려질 필요”
“너무 많은 사건이 학폭돼 학폭위 제도 취지 퇴색”
모호한 ‘학폭’ 정의…“피해 따른 명확한 처분 기준 세워야”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 부정적 반응 다수
학교 폭력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신체‧언어 폭력뿐만 아니라 사이버상에서의 괴롭힘, 연인 간의 스토킹 등 그 양태도 다양화하고 있다.
10일 교육계에 따르면 올해부터 학교 폭력 예방·근절을 위한 여러 조치들이 시행돼 왔다. 3월에는 교사 대신 학교폭력 사안 조사를 담당하는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이 투입됐다. 교육부는 학교폭력 가해 학생의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보존 기간을 2년에서 최대 4년으로 늘리는 ‘초·중등교육법 시행규칙’도 1학기부터 시행했다.
전문가들은 온전한 피해자 회복과 가해자 교화를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면서 이를 위해서라도 모호한 학폭 개념부터 재정의하고 ‘진짜 학폭’을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능사 아닌 학폭위…피해자 회복에 중점 둬야”
학교 폭력 신고가 접수되면 학교장이 자체 해결하거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가 열린다. 학폭위에 회부된 가해 학생은 서면 사과부터 퇴학까지 총 9가지 처분 중 하나를 받게 된다.
문제는 학폭위가 열리고 가해자가 처분을 받기까지의 과정이 되레 피해 학생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 1호 학교폭력 전문변호사인 노윤호 법률사무소 사월 변호사는 “불이익이 많아질수록 가해자 측에서는 학폭 사건을 부인하려고 하고 더 분쟁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며 “피해자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받고 싶었던 것이지만, 분쟁이 길어지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생활기록부 보존 기간을 늘리는 것이 피해자 회복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 변호사는 “생기부 기재 보존 기간을 늘린다는 것보다 사건 발생 직후 효과가 있는 방식의 처분이 내려져야 한다”며 “피해자와 가해자의 즉각적인 분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낫다”고 강조했다.
노 변호사는 학폭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조건 학폭위 절차를 거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관계 회복 프로그램’처럼 학교 내에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는데 학부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며 “학폭위에 따른 징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해자 교화 필요…중요한 학폭 사건 가려내야”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교폭력예방법)에는 피해 학생 보호뿐만 아니라 ‘가해 학생의 선도·교육’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다. 판사 출신인 신혜성 법무법인 존재 변호사는 “피해자 회복도 중요하지만 가해 학생 교화에도 무게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변호사는 “학폭위 자체가 드라마 ‘더글로리’ 같은 심각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러다 보니 피해자 보호 쪽에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과를 받고 끝낼 만한 일도 학폭 신고가 들어가면 문제를 해결할 기회 자체가 박탈되기도 한다”며 “진짜 학폭 피해자와 진짜 학폭 사건을 가려내지 못하는 것이 현재 제도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사건들이 학폭이 되다 보니 오히려 학폭위 제도의 의미가 퇴색되는 부분도 있다”고 지적했다.
“처분 불복률 증가 추세…적절한 처분 이뤄지는지 검토할 시점”
소년·학교폭력 분야 2급 공인전문검사(블루벨트) 자격을 보유한 신혜진 서울중앙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 부장검사는 “피해자 회복과 가해자 교화 모두 중요하지만, 둘 다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신 부장검사는 “학폭위의 처분에 불복하는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이 지난 3년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며 “처분이 중해서 불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해 학생이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는 경우 이뤄지는 조치인 서면사과에 대한 불복률도 높다. 적절한 처분이 이뤄지고 있는지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신 부장검사는 현재 모호한 학교 폭력 정의를 재검토하고, 피해 정도와 그에 따른 처분의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현재 학폭 정의는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 너무 포괄적”이라며 “경미한 행위, 사소한 과실도 학폭으로 신고받아 처리하고 있는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 미국 등에서는 경미한 괴롭힘이 아닌 학교 생활에 상당한 지장을 받을 정도의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인 괴롭힘 등 피해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는데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생기부 기재를 통해 학폭으로 인한 처분의 엄중함을 가해 학생에게 깨닫게 하는 응보적인 조치도 중요하다”면서도 “피해 학생의 회복을 위해 가해 학생이 실제로 많은 노력을 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면 피해 학생의 동의가 없어도 생기부에서 삭제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 현 상황은?
교육부가 퇴직 경찰·교원 등에게 학교폭력 사안 조사를 맡기는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를 시행한 지 100일이 지났지만, 현장에서는 제도가 본래 취지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조사관제 시행 100일을 맞아 3일 교원 301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관 제도가 취지에 맞게 학교 현장에서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은 36.2%였지만,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42.5%로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관제 도입 이후 관련 업무가 줄지 않았고, 사안 처리도 학교가 맡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린다는 등 이유였다.
서울 지역 교사 A 씨는 “아이들 간 작은 다툼도 폭력으로 규정 짓고 사안 조사에 들어가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경미한 사안은 학교에서 직접 처리하는 게 낫다”고 밝혔다.
신 부장검사는 “교사의 개입이 적어진다면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가 더 떨어지고, 학폭전담조사관이 학교 현장을 잘 모른다는 점을 이용한 무고성 신고 및 허위 진술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며 “교사들의 업무 과중 등 고충이 많아 조사 업무를 외부에 맡긴 건데 이 제도를 통해 학폭 사건이 줄고 가해 학생의 진정한 반성, 피해 학생과의 원만한 관계 회복이 제대로 이뤄질지는 향후 여러 통계들을 통해 경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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