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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잔에 3000원.
와인을 커피보다 싸게 판매하는 곳이 있다. 바로 탭샵바다. 2022년 동대문에 처음 등장한 이곳은 을지로, 도산대로에 이어 여의도점까지 모두 4곳으로 늘어났다. 150평 이상인 매장 한 켠에는 수백 병의 와인 판매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탭(디스펜서로 음료를 따를 수 있는 기계)에 80개 종류의 와인과 사케, 위스키가 꽂혀 있다. 이곳은 QR코드로 한잔씩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다. 순대튀김·오이스터·스테이크·부라타샐러드 등 서른 가지의 음식도 주문해 와인과 함께 곁들일 수 있다. 커피나 차 등 음료 메뉴도 이용 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다른 와인바와는 달리 하루 종일 사람들이 북적인다. 저녁에는 대기행렬도 발생한다. 연령대도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10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탭샵바에서 만난 나기정 대표는 이곳을 ‘자신의 노하우가 모두 담긴 결정체’라고 평가했다. 그는 “와인은 두 번째 아메리카노”라며 “가성비 좋은 와인을 곁들일 음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을 활용해 ‘제2의 스타벅스’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나 대표는 와인 수입사에서 와인 상품기획자(MD)로 브랜드 관리를 하다 직접 와인바를 창업하고 와인숍까지 운영하는 등 약 20년간 와인 업계에 몸담아 온 와인 전문가다.
그가 와인에 매료된 시점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배우’라는 직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 대표는 돌연 영국으로 ‘와인 유학’을 떠났다. 그는 “무대에 서면 관객들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와 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면서도 “그때부터 타인과 소통하는 법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영국으로 와인 유학을 떠나는 것은 어찌 보면 생소한 행보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은 미국이나 프랑스·호주·이탈리아 등 와인 생산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대표는 영국에 유럽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유명한 와인이 모인다는 것에 주목했다. 영국 왕실이 인정하는 와인은 전 세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비싸고 좋은 와인들의 유통이 가장 활발한 곳이 영국이다.
그는 와인의 생산지·품종에 대한 공부를 넘어서 와인 유통, 비즈니스, 전 세계 유통법 등을 배우고 싶었다. 영국 와인비즈니스 석사 과정을 밟는 동안 소믈리에 자격증 다섯 개를 땄다. 이후 미슐랭2 레스토랑을 비롯해 다양한 와인바에서 소믈리에로 활동한 뒤 2009년 국내로 돌아와 와인 수입사의 MD로 근무하며 실무에 필요한 기본기를 익혔다.
나 대표는 2013년 ‘와인주막차차’를 창업하면서 한식과 와인 페어링 대중화의 첫발을 내딛었다. 석사 과정을 마치며 썼던 ‘한국시장 와인 대중화’라는 논문 제목을 현실화한 이곳은 초보자들도 와인에 쉽게 입문할 수 있도록 메뉴판을 알고리즘화했다. 또 차돌박이 라면, 차돌 된장 등을 대표 메뉴로 해 친근함을 더했다.
이어 ‘한잔차차’ ‘차차등심’ ‘스테이크슈퍼’ ‘부라타랩’ ‘와인도깨비’ 등 여덟 개의 식음료(F&B) 브랜드를 내놓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경영상의 이유 등으로 실패한 브랜드들도 생겼다. 그럼에도 나 대표는 스스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한식’이라는 판단하에 경험을 쌓았다. “여러 브랜드를 하며 얻은 노하우 등을 총망라한 탭샵바가 종착점”이라고 평가했다.
탭샵바는 카테고리 기능 세 개의 결합이기도 하다. 탭에 걸린 80종의 술들은 집객 효과를 창출한다. 샵은 비즈니스모델에 해당되는데 바는 사람들이 자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 대표는 “탭샵바는 단순한 바를 넘어선 모델로 전 세계 유일하다”며 “다른 바와는 달리 샵 가격으로 와인을 판매하고 서빙은 셀프인 이색적인 모델”이라고 밝혔다.
샵 가격으로 와인을 판매하다 보니 다른 와인바 대비 가격이 월등히 저렴하다. 이처럼 와인 가격을 싸게 책정할 수 있는 것은 나 대표의 ‘박리다매’ 철학 덕분이다. 탭샵바에서 취급하는 와인들도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와인 150~300종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와인샵은 숫자 싸움”이라며 “매입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마진율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와인 판매 마진을 낮추는 대신 F&B에서 수익을 낸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살수록 ‘규모의 경제’를 통해 입고되는 와인 가격이 낮아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매장 한 곳당 연간 매출은 20억~30억 원 수준이다. 올해 탭샵바의 예상 매출액은 100억 원 수준이다.
나 대표는 탭샵바로 ‘배달’ 시장에 진출하는 게 목표다. 한국은 전 세계 중 유일하게 주류 배송이 금지된 국가다. 2020년 4월 주류 온라인 결제가 허용됐고 배송과 관련한 규제는 보다 완화하는 방안으로 논의하고 있다. 배송이 가능해지면 그는 탭샵바 업장을 온라인 와인숍의 오프라인 매장 겸 창고로 활용할 예정이다. 배달의민족 B마트가 30분 딜리버리를 위해 수도권에 수십 개의 물류 거점을 두고 30분 이내 배달을 하는 것처럼 온라인에서 결제한 와인을 탭샵바 매장에서 바로 배달하거나 픽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나 대표는 이달 중 5호점을 내고 중장기적으로 수도권 지역에 50곳의 매장을 확보할 예정이다.
필요한 시스템은 이미 지난해부터 구축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3월 웹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객들은 카카오 채널에 접속해 회원 가입을 하고 로그인을 한 뒤 결제를 한다. 이후 각 탭에서 QR코드로 셀프로 연동해 와인을 받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특징은 재고와 웹상 재고가 실시간 연동된다는 점이다. 다른 온라인 와인 결제 시스템은 매장과 리스트나 재고 동기화가 실시간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탭샵바는 실시간 동기화가 가능하다. 또 고객별로 어떤 와인을 선호하는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어 재고관리도 쉽다. 웹 결제 시스템을 이용한 고객은 지난달 기준 3만 명으로 재방문율은 50%가 넘었다.
그는 “스타벅스처럼 사이렌오더로 주문하고 추후 B마트와 같은 와인 배송 시스템까지 확보하는 게 목표”라며 “고객들이 스타벅스에서 휴식을 취하듯 탭샵바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그에 걸맞은 공간을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 대표는 국내에서 와인이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술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문화 대신 와인 한잔으로도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 대표는 “한식의 세계화, 와인의 대중화를 목표로 20년 가까이 와인 사업에 몸을 담고 있다”며 “와인을 술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음료나 커피로 접근할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돼야 규모가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밝혔다.
탭샵바는 해외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와인바 문화가 먼저 형성된 선진국에서도 매장을 오픈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올 5월 탭샵바는 50억 원의 투자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한국 문화와 F&B는 세계적인 수준이 됐고 디테일이 우수하다”며 “한국의 글로벌 브랜드, 글로벌 한국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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