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한국조선해양, ‘수주호황’ 넘어 ‘실적호황’ 진입
지주사로 자금유입 확대시 정 부회장 지분확대 여력 늘어
잇단 자사주 매입으로 경영승계의 발판을 마련해 온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이 조선 계열사들의 실적 호조에 힘입어 한층 속도를 높일 수 있을지 관심이다.
그룹 지주사인 HD현대 지분 확보와 이를 통한 배당금 수령 확대, 확대된 배당금을 활용한 추가 지분매입의 선순환은 부친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보유지분의 증여 혹은 상속에 따른 세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으로 꼽힌다. 조선 계열사 실적 호조에 따른 HD현대로의 자금 유입은 이 선순환의 속도를 높여줄 원동력이 될 수 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그동안 HD현대의 배당 재원은 주로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사이트솔루션, HD현대일렉트릭 등 비조선 계열사들로부터 마련돼 왔으나 앞으로는 HD한국조선해양 산하 조선 계열사들의 비중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오랜 기간 HD현대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왔던 HD현대오일뱅크는 올 2분기를 기점으로 실적이 하향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고금리·고유가 등으로 석유제품 수요가 감소하는 와중에 해외 신증설 설비들의 잇단 가동으로 공급은 늘어나면서 정유업계가 마진 압박을 받는 탓이다. 올 1분기 15달러 선이었던 복합정제마진은 한때 5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최근 8달러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증권사들은 정유업체들의 2분기 영업이익에 대해 부정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키움증권은 HD현대오일뱅크의 영업이익이 1분기 3052억원에서 2분기 560억원으로 급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캐시카우, 정유에서 조선으로…HD한국조선해양, 年 1조 영업익 예상
이런 상황에서 맞은 조선업 호황은 전화위복을 넘어 본업(本業)이 조선인 HD현대에게는 최고의 호재다. 엄밀히 말해 호황은 2~3년 전부터 왔고, 지금은 수확의 시기다. 2022년 이후 크게 높아진 선가에 수주한 물량이 2년이 지난 시점에 인도되면서 잔금을 손에 쥐게 된 조선사들이 ‘수주호황’을 넘어 ‘실적호황’을 맞게 된 것이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의 실적 컨센서스(증권사 예상치 평균)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은 1분기 213억원으로 흑자에 겨우 턱걸이했던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2분기 936억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3분기 이후에는 1000억원대 중반까지 분기 영업이익이 늘어나 연간 4000억원대 흑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 3사의 실적이 좋아지면서 HD현대의 조선부문 중간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의 실적도 크게 개선될 전망이다. 1분기 1602억원이었던 연결 영업이익은 2분기 2466억원까지 오르고, 3분기 이후에도 상승 흐름을 타 연간 1조원대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 계열사들의 실적 개선은 지주사인 HD현대의 실적 호조로 이어진다. HD현대의 지난해 연결 영업이익은 2조316억원이었으나 올해는 3조원대로, 50%가량 확대될 것으로 증권사들은 예측했다.
HD현대 주식매입→배당확대→주식매입 실탄 확보 '선순환'
HD현대가 계속해서 긍정적인 실적 모멘텀을 유지한다면 정기선 부회장의 경영승계 발걸음은 한층 빨라질 수 있다.
정 부회장은 지난 5월 초부터 이달 5일까지 두달여 간 꾸준히 HD현대 주식을 사들여 왔다. 여기에 들인 돈은 도합 400억원에 육박한다. 이를 통해 1분기 말 5.26%였던 정 부회장의 HD현대 지분율은 마지막 매입일인 5일 기준 5.99%로, 0.72%p 높아졌다.
회사측은 정 부회장의 주식 매입에 대해 “주가 흐름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책임경영 의지를 밝혀 시장에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경영승계와 떼놓고 생각하긴 힘들다.
HD현대의 최대주주는 정 부회장의 부친인 정몽준 이사장으로, 26.6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다른 기업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분을 장남이 오롯이 물려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막대한 증여세‧상속세와, 다른 형제들(2남 2녀)의 존재를 감안하면 증여가 됐든, 상속이 됐든 정기선 부회장의 몫으로 남겨지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정기선 부회장은 2018년 부친으로부터 3040억원을 증여받아 HD현대(당시 현대로보틱스) 지분을 사들였으며, 이때 발생한 1500억원 규모의 증여세를 지난해 7월이 돼서야 모두 납부했다.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해 증여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5년이 걸린 것이다.
정 이사장 역시 정 부회장에게 증여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HD현대 주식을 담보로 상당액의 대출을 받은 상태다.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HD현대에 대한 정 부회장의 지배력을 늘리는 것은 둘 모두에게 무리다.
먼 훗날 지분 일부를 상속받더라도 그 이전까지 정 부회장 자력으로 HD현대 지분을 최대한 확보해 놓는 것이 최선이다. 지분 인수를 위한 가장 큰 자금원은 HD현대로부터의 배당이다.
HD현대는 상장 당시 배당 성향 70%이상(별도 순이익 대비)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한 이후, 실제 그 이상의 고배당 정책을 유지해 왔다. 심지어 총 배당금 규모가 별도 순이익을 넘어선 사례(2020년, 2022년)도 있었다. 2021년 이후 3년 연속 배당금 3000억원을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3886억원을 배당했다.
지분이 확대될수록 챙길 수 있는 배당도 늘어나니 정 부회장으로서는 HD현대 지분을 늘리는 게 ‘목적’이자 ‘수단’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본격화된 조선 계열사들의 호실적, 그리고 HD현대로의 자금 유입은 정 부회장의 경영승계 행보에 천군만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주가상승, 노조 반발 등 위협 요인도
물론, 긍정적 상황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정 부회장이 주가 부양을 위해 주식을 사들인다는 회사측 설명과 상충되게, HD현대의 주가가 오를수록 정 부회장의 지분 확대 여력이 줄어든다.
조선 계열사들의 실적 호조, 중전기기 계열사인 HD현대일렉트릭의 AI(인공지능) 붐 수혜, HD마린솔루션 상장 등 호재가 잇따르면서 HD현대의 주가는 공교롭게도 정 부회장이 자사주 매입을 시작한 5월 초 이후 우상향하고 있다.
주가 상승은 보유 주식에 대해서는 호재지만, 정 부회장처럼 앞으로 주식을 취득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악재다. 현 시점에서의 주식 매입 비용 부담은 물론, 훗날 지분 상속에 따른 상속세 부담 역시 커진다.
HD현대중공업 노조(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등 조선 계열사 노조의 반발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조선 3사 노조는 조선 계열사들에게서 발생한 수익을 지주사인 HD현대가 독식해 거액 배당으로 주주들에게 나눠주는 데 반발하며 정기선 부회장에게 직접 통합 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HD현대중공업의 알짜 사업이었던 선박 서비스 부문을 떼어내 상장한 뒤 HD현대중공업이 아닌 HD현대 자회사로 편입한 데 대해서도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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