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에 총성 없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간 업권 경계가 무너지면서 출혈경쟁이 심화하는 분위기다. 지난해부터 보험사 영업 실적을 평가하는 ‘채점 기준’이 달라진 게 보험사 경쟁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도입된 국제회계기준(IFRS17)으로 인해 영업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부채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하는 IFRS17로 인해 핵심이익지표인 계악서비스마진(CSM)을 확보하는 게 실적 산정에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생보와 손보를 통틀어 ‘보장성 상품’이 CSM을 늘리는 데 효과적이라는 판단이다.
생보사들은 실적 산정에 불리한 저축성 상품보다는 종신보험, 제3보험(건강보험, 암보험, 어린이보험) 등 보장성 상품 취급 비중을 늘리는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간 손보사 영역이었던 시장에 생보사가 손을 대자 업권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경쟁력 확보를 위해 보험사들은 가입 문턱을 대폭 낮추거나,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보험 상품을 출시하는 등 차별화에 나섰다.
종신보험에 질병 보장 탑재…차별화 나선 생보사
생보사는 종신보험에 암, 뇌혈관 질환 등 주요 질병까지 보장하는 상품을 내놓으면서 차별화에 나섰다. 한화생명은 사망에 암 보장을 결합한 ‘암플러스 종신보험’을 출시했다. 가입자가 암에 걸리면 사망보험금을 두 배로 올려주는 상품이다.
타 생보사도 비슷한 구조의 상품을 출시했다. KDB생명은 종신보험 가입 중 건강보장 특약에 중도 가입할 수 있는 ‘(무)더블찬스종신보험’을 이달 초 출시했다. 필요한 시점에 원하는 보장 항목을 추가로 선택할 수 있다. 새로운 치료기술을 보장하는 담보를 가입할 수 있는게 강점이다.
교보생명은 ‘교보암·간병평생보장보험 (무배당)’을 지난 2일 출시했다. 보장과 저축 기능을 모두 갖춘 종신보험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암이나 장기간병상태(LTC)로 진단 시 낸 보험료를 100% 돌려준다. 이후 보험료 납입도 면제된다.
동양생명도 최근 ‘(무)수호천사내가만드는유니버셜종신보험’을 선보였다. 무사고 유지 시 보너스를 준다. 특약을 가입하고 보험료 완납 시점까지 암, 뇌혈관, 허혈심장질환 진단을 받지 않으면 주계약 적립금에 더해 무사고 보너스를 지급한다.
이처럼 공격적인 영업 전략에 그간 손보사의 텃밭이라 여겨졌던 제3보험(생보와 손보 중간지대에 있는 보험)의 생보사 시장점유율은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20%대에서 올 1분기 30%대로 올랐다.
월납 초회보험료(APE)도 손해보험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APE는 신규 보험 계약에 따라 들어온 첫달 보험료. 생보사 5곳(삼성생명·한화생명·교보생명·신한라이프·NH농협생명)의 지난 1분기 제3보험 신계약 APE는 1049억원으로 손보사 5곳(삼성화재·DB손해보험·현대해상·메리츠화재·KB손해보험) 1466억원의 70% 수준까지 쫓아왔다.
보험사 출혈경쟁에 당국 고심↑…”정확한 손해율 가정 어려워”
업계 경쟁이 격화할수록 소비자 입장에선 더 나은 조건으로 보험에 가입할 수 있어 유리하지만, 감독당국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해당 상품들은 기존에 없던 상품 구조인 만큼, 정확한 손해율을 가정하기 어렵다. 현재의 출혈경쟁이 향후 손해율 악화로 이어진다면, 결국 보험료 인상 등 소비자 피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보험사 단기 출혈경쟁에 대해 감독권한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의 연이은 ‘자제령’에도 과도한 보장을 앞세운 과열 경쟁이 되풀이되고 있어서다.
금감원은 보장한도를 제한하거나 설계사 수수료 기준을 변경하는 등 종합적인 가이드라인을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다. 상품개발 단계에서 보장 위험을 넘어서는 과도한 한도를 적정하게 제한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지난달 말 보험사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나 “국내 보험산업은 이미 시장 과포화 상태로 성장한계에 직면했는데, 보험사들은 혁신성장보다는 출혈경쟁에 몰두하는 등 미래 대비 노력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보험사의 과당경쟁에 대해 경고한 만큼, 당국의 감독행정 강도는 더욱 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금감원은 “판매 위주 경쟁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사회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다양한 보험 서비스 개발 경쟁과 해외진출, M&A 등을 통한 시장 개척 노력을 병행해달라”고 당부했다. 특히 “일부 보험사·판매채널의 불건전 영업관행과 단기 출혈경쟁에는 감독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공정한 금융 질서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전대현 기자 jdh@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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