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훈민정음 서문은 위 구절로 시작된다.
15세기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말(구어)에서는 한국어가 쓰였으나 모든 글(문어)은 한자로 된 한문(중국어)으로 쓰였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쓰는 일은 한문을 모르는 일반백성은 할 수 없었으며 지식인층의 전유물에 그쳤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세종이 한글을 만들면서 글은 더 이상 양반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백성이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약 600년이 지난 21세기 한국 금융업계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책을 찾아나선 증권사가 있다. 바로 KB증권이다.
금융업권에서 쓰이는 용어들은 소위 ‘그들만의 언어’로 불린다.
PER, BPS, DSR, LTV, 피크아웃, 마진 레버리지 등등 알아듣기 어려운 영단어들이 문서를 빼곡히 꿰차고 있다. 심지어 ‘녹색 경제’를 ‘그린 이코노미’라 하는 등 기왕의 한국어 단어를 구태여 영어 형식으로 고쳐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KB증권은 언어 순화작업인 ‘쉬운 말 프로젝트’를 국내 증권사 가운데 유일하게 추진하고 있다.
KB증권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이 사업의 총괄책임자인 하우성 디지털사업총괄본부 전무를 비즈니스포스트가 4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 증권사 앱을 보지 않는 증권사 고객
하 전무는 애초 IT개발자 출신으로 2019년 KB증권으로 옮기면서 증권업계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처음 증권업계에서 일할 당시 단어들이 너무 어려워 애먹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한 번은 어느 기업과 만남을 가졌는데 ‘도산절연’이라는 단어를 보게 됐습니다. 저는 한자를 배운 세대인데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그 때 문제의식을 처음 느끼고 어려운 용어를 고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하 전무가 살펴보니 금융업권은 대부분 용어가 한자나 영어로 이뤄져 있었다. 심지어 영단어들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영단어가 아닌 경제학 전문용어나 약자가 대부분이었다.
“고객들한테 상품을 설명할 때도 이런 용어들이 그대로 쓰였습니다. ‘나도 어려운데 고객들은 오죽하겠나’는 문제의식을 이 때 강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후 KB증권이 자체적 고객대상 실험을 실시한 결과 고객들은 KB증권 모바일앱을 쓰다가도 어려운 용어가 나올 때면 앱을 이탈해 인터넷 사전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과정에서 고객들이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단어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실 휴대폰 증권앱은 잠깐 동안만 사용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앱 사용이 중단되면 고객들을 잃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그래서 △KB증권만의 자체적 순화어 사전 만들기 △보도자료⠂보고서⠂상품설명서에서 어려운 용어 풀어 쓰기 등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 쉬운 말 프로젝트 컨트롤타워 ‘콘텐츠전략스콰드’ 결성
KB증권의 이같은 노력은 3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사적으로 쉬운 말 사용하기 프로젝트가 실시됐으며 서류상 언어 순화도 시작됐다.
현재 프로젝트 컨트롤타워로 KB증권 디지털본부 아래에는 ‘콘텐츠전략스콰드’ 팀이 편제돼 있다. 경제지 출신 기자, 금융 작가 등을 따로 채용해 약 20명의 인력으로 구성했는데 KB증권에서 생산되는 모든 문서자료를 쉬운 용어로 다시 풀어주는 작업을 전담한다.
“가령 KB증권 리서치본부 소속 연구원이 낸 보고서의 용어들을 콘텐츠전략스콰드가 쉬운 단어들로 대체한 뒤 다시 연구원에게 보내 글의 의미에 변함이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 최종 출고하는 식입니다.”
이 밖에 KB증권 리서치본부 차원에서도 신입 연구원이 입사하면 쉬운 글쓰기 방법을 가르치는 등 전사적으로 쉬운 말 프로젝트가 실시되고 있다.
KB증권 디지털본부는 지금까지 두 차례 ‘쉬운 글쓰기 언어 가이드’를 전사적으로 배포했다. 특히 고객들을 직접 상대하는 지점 영업직원들을 대상으로 쉬운 용어 쓰기를 교육해 고객 대상 설명력을 높이고 있다.
“관련 직원들을 대상으로 초기 버전과 언어순화 버전 두 가지 글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교육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 접목, 쉬운 말 프로젝트의 도약
하 전무는 생성형AI의 등장으로 쉬운 말 프로젝트가 한 단계 더 진화할 것으로 바라봤다.
KB증권은 생성형AI을 활용해 향후 회사 전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쉬운 말 사전’을 제작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번역해주는 기능을 생성형AI에 학습시켜 둔 뒤 KB증권이 문서를 생산할 때마다 이 AI에 검수를 맡기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이같은 생성형AI 기술은 글로벌 기업인 어도비가 보유하고 있다. 하 전무는 어도비의 기술을 KB금융그룹에 도입해 모든 계열사가 함께 쉬운말 사전을 공유하는 방향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일일이 번역을 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생성형AI의 등장으로 이같은 작업이 몇 배는 더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KB증권은 이 밖에도 쉬운 말 프로젝트 관련 다양한 디지털 기술 도입을 예고하고 있다.
“10월부터는 콘텐츠관리시스템(CMS)을 KB증권 전 직원들이 사용하게 될 예정입니다. KB증권 직원 누구나 여기에서 최신화한 언어 가이드를 열람할 수 있게 됩니다.”
◆ 쉽지 않았던 출발, 고객 중심 사고의 결실
하 전무는 쉬운 말 프로젝트 초기 시행단계가 쉽지만은 않았다고 돌이켰다.
“쉬운 말 프로젝트가 당장에 수익성이 있는 사업은 아니다 보니 반발에 부딪혔던 것도 사실입니다. 증권업계에서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박정림 전 KB증권 대표이사 사장이 쉬운 말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전폭적 지지를 아끼지 않은 결과 이 사업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쉬운 말 프로젝트는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는 편은 아니지만 고객들의 호감도를 높이고 마음을 녹여줄 수 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이 증권사는 자기들의 언어가 아니라 쉬운 용어를 쓰네?’라는 점을 고객들이 알게 되면서 최근 인터넷상에서 KB증권이 생산한 콘텐츠의 노출도가 빠르게 상승하는 점이 확인됩니다.”
하 전무는 마지막으로 KB증권의 쉬운 말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의 편의를 위하는 진정성이라고 덧붙였다.
“돈과 직결되는 순간 쉬운 말 프로젝트의 진정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한 달에 보통 180개 정도 콘텐츠를 만드는데 이 중에는 저희 상품과 관련 없는 것도 많습니다. 그만큼 순전히 고객 중심의 정보 제공 측면에서도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객의 긍정적 경험으로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하 전무는 IT업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네이버, 이베이코리아, 11번가 등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2019년 KB증권으로 적을 옮긴 뒤 현재 디지털사업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김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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