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형님 또는 아우 격인 관계사의 힘을 빌려 위기 돌파에 나서고 있다. 더 나은 조건으로 설비 투자 재원을 마련하고 재무구조도 개선하기 위한 조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한파를 겪으며 삼성디스플레이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삼성전자는 2023년 2월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운영자금 20조원을 차입했고, 올 3월에도 삼성디스플레이의 첫 배당을 실시해 5조6000억원대의 배당금을 챙겼다.
당시 업계 안팎에서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관련 대규모 투자를 이어감에 따라 현금 사정이 양호한 삼성디스플레이가 모회사를 지원하려는 목적일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직격탄을 맞은 배터리 자회사 SK온에 꾸준히 현금을 투입하고 지급 보증을 섰다. 2023년 1월에 SK온 유상증자에 2조원을 투입한 후 같은 해 9월에도 유상증자로 1조1433억원을 조달했다. 지난해 10월 SK온이 해외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확보 차원에서 현대차·기아와 2조원 한도의 차입계약을 체결할 때도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이 차입금 지급보증에 나섰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3월 관계사인 LG전자에 6.06%의 금리로 1조원을 긴급 차입했다. 2022년 2분기부터 실적부진이 이어지면서 주력 제품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생산에 집중하기 위한 유동성 확보를 위한 조치였다.
LG전자는 또 LG디스플레이의 주주배정 유상증자(총 1조3579억원)에 참여해 4940억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LG전자는 LG디스플레이 지분 37.9%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관계사 지원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돈을 빌려주는 기업 입장에서는 현금 유출로 인해 다른 곳에 투자하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빌린 20조원 규모 차입금의 이자 비용만 1조원에 육박한다. 만기는 내년 8월이다. 다만 삼성전자는 정부가 최근 개시하는 17조원 규모의 저금리 대출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삼성디스플레이에 갚아야 할 차입금 역시 만기일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SK온 지원에 자금을 쏟은 SK이노베이션의 총부채는 2023년 말 기준 50조8155억원으로 역대 최대다. 2022년보다 15.6% 늘었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올 3월 SK이노베이션의 신용등급을 기존 BBB-에서 BB+로 하향했다. 신성장 동력으로 기대를 모은 전기차 배터리 사업이 모회사의 신용도를 휘청이게 한 셈이다. SK이노베이션이 지급한 이자비용도 2023년 1조1440억원으로 2021년 대비 190% 급증했다.
LG전자도 LG디스플레이에 금전대여 및 유상 증자 참여를 통해 발생하는 현금 유출이 영업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LG전자는 이에 유동성 우려가 크지 않다는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관계사의 지원이나, 지원을 받게 되는 경우는 대기업에서 흔한 일이지만, 관계사의 지원을 받은 회사가 빠른 시일 내 현금을 창출하지 못하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IT조선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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