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인 동시에 나침반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법정에서 나침반의 방향을 돌려놓을 사건들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세상을 바꾼 법정’ 시리즈를 통해 과거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대체됐는지를 살펴본 데 이어 ‘세상을 바꿀 법정’ 시리즈를 통해 나침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짚어봤다.
(서울=뉴스1) 이세현 기자 = #1. 2018년 7월 배드파더스는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나쁜 아빠’들의 이름과 출생 연도, 직장명, 얼굴 사진 등을 공개했다. 신상정보가 공개되자 서둘러 양육비를 지급하는 나쁜 아빠들이 줄을 이었다.
#2. 2022년 8월 A 씨는 남편과 상간녀의 대화 내용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여기에는 “절친한 친구 아내와 1년 6개월 연애” 등 남편과 상간녀의 신상정보 일부가 포함돼 있었다.
배드파더스와 A 씨는 모두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처벌을 받았다. 많은 이들은 질문한다.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인권과 나쁜 아빠들의 명예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하냐고.
우리 사회는 이처럼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형사 처벌하도록 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두고 긴 시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진실한 사실을 말하는 자에 입막음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인격권 보호를 위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유지돼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성적 지향, 불우한 과거 등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사자가 알리길 꺼리는데 동의 없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헌법재판소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해당 조항의 위헌성을 확인해달라는 청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헌재 “사실적시 명예훼손, 인격권 보호…위헌 시 비밀 침해 우려”
통상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으로 불리는 법 조항은 형법 제307조 제1항,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 제1항 두 가지다.
말로 하거나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등 직접 행동하는 경우엔 형법, 인터넷을 이용하면 정보통신망법으로 의율 된다.
형법 제307조 제1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정보통신망법 제70조 제1항은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의 위헌성을 확인해달라는 청구는 여러 번 제기됐지만, 헌법재판소는 해당 조항들이 합헌이라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헌재는 2021년 2월 형법 제307조 제1항에 대해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헌재는 “심판대상조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를 형사 처벌하도록 규정함으로써 개인의 명예, 즉 인격권을 보호하고 있다”며 “명예는 사회에서 개인의 인격을 발현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므로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의 우열은 쉽게 단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민사적 구제방법만으로는 형벌과 같은 예방효과를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입법목적을 동일하게 달성하면서도 덜 침익적인 수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만약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를 고려해 심판대상조항을 전부 위헌으로 결정한다면 외적 명예가 침해되는 것을 방치하게 되고, 진실에 부합하더라도 개인이 숨기고 싶은 병력·성적 지향·가정사 등 사생활의 비밀이 침해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헌재는 이후 제기된 헌법소원 사건에서도 “선례를 변경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합헌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 제70조 제1항도 마찬가지다. 헌재는 지난해 9월 이 조항에 대해서도 합헌 결정했다.
헌재는 “진실한 사실이라도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명예훼손적 표현은 정보통신망이 갖는 익명성과 비대면성, 빠른 전파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개인에 대한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살포될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하여 개인의 인격을 형해화시키고 회복 불능의 상황으로 몰아갈 위험이 존재한다”고 합헌 결정 이유를 밝혔다.
◇계속되는 헌법소원…의견 엇갈리는 법조계
그런데도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은 계속되고 있다. 진실을 말한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육비 미지급 부모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가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배드파더스’ 사이트의 구본창 대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가해자 신상을 공개한 유튜브 채널 ‘카라큘라 미디어’ 운영자도 벌금형을 받자 헌법소원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특히 최근 과거 밀양에서 벌어진 집단성폭행 사건이 재조명되며 사회적 공분이 일고 있다. 동시에 이 사건 가해자들이 자신의 신상을 공개한 유튜버에 대한 법적 대응을 예고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존속과 폐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수도권의 한 법학대학 교수는 “사실이라고 한들 그것을 남들이 전부 알아야 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가정 환경이나 병력 등 본인의 책임 없는 사정들이 남들에게 알려져 인격권이 훼손되고 앞으로의 사회생활이 위축될 우려도 있다. 명예훼손의 특성상 회복도 쉽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존속 필요성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제재는 민사로 이뤄지는 나라가 더 많다”며 “형사 처벌까지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다시 한번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부장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형사 범죄 의율이 능사는 아니다”라며 “성적 지향 등 공공의 이익이 목적이 아닌 타인의 비밀을 말하는 사람은 형사처벌보다는 도덕적 지탄을 더 크게 받아야 하고, 원래는 당사자도 처벌보다 그 부분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형사처벌이 없을 경우를 우려하게 되는 것”이라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논쟁은 결국 우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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