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회장은 ‘유산균 음료’를 국내에 처음 들여온 선구자다. 1927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삼호유업을 세우고 6개월 후 ‘한국야쿠르트유업’을 설립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국내 발효유 가공기술은 전무한 상황이라 당시 우리보다 기술이 앞서 있던 일본야쿠르트와 손잡았다. 때마침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외자 도입을 적극 권장하던 시기였다. 2년여 준비 끝에 1971년에 사업을 본격화했다. ‘야쿠르트 아줌마(現 프레시 매니저)’ 47명이 국내에서 생산한 야쿠르트 7200개를 고객에게 배달했다. 국내 발효유 시장이 한 기업가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다.
창업 후 윤 회장의 시선은 ‘기술 독립’으로 향했다. 자체 기술력을 갖춘 기업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hy는 1976년 식품업계 최초로 기업부설 연구소를 설립하고 유산균 연구를 시작했다. 전력투구 끝에 hy는 1996년 국내 최초 한국형 ‘비피더스균주’ 국산화에 성공한다. hy는 현재 자체 개발한 균주로 제품을 만들고 있다. 미래를 내다본 윤 회장의 뚝심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우리 손으로 어렵사리 만든 제품이기에 자부심도 컸다. 외국에서 온 손님을 맞을 때로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었으니 안심하고 드시지요”하며 늘 야쿠르트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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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아줌마’로 여성 일자리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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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하면 생각나는 방문판매 조직 야쿠르트 아줌마는 윤 회장의 경영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가정주부가 밖에 나가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윤 회장은 가정주부의 노동력도 잘 활용하면 국가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주부판매 방식을 과감히 도입했다.
회사 성장에 큰 역할을 한 만큼 관심도 각별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길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를 만나면 차에서 내려 감사 인사를 전했다. 평소 나서는 걸 지극히 꺼리는 그였지만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모이는 ‘야쿠르트 대회’ 때는 직접 무대에 올라 한달 전부터 준비한 노래를 불렀다.
윤 회장은 ‘기업은 공익(公益)에 우선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임직원들에게 늘 강조해왔다. 1979년 일어난 ‘파지 사건’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당시 기준으로 3억원 상당의 야쿠르트 배양액에 유산균 수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품화하는 데는 전혀 이상이 없었지만 윤 회장은 전량 폐기하라고 지시했다. 이대로 시중으로 내보내는 건 소비자 이전에 나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윤 회장은 설립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해 왔다. 회사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변경구 현 대표이사도 10년 이상 주요 부서를 거치며 지난해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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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몸노인·저소득층 자녀 등 소외된 이웃에 나눔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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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회장은 회사 설립 이후 평생을 나눔 실천을 위해 힘썼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홀몸노인 돌봄활동’이 대표적이다.그는 1994년부터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홀몸노인 문제 해결을 위해 ‘홀몸노인 돌봄활동’을 기업 차원에서 펼쳐왔다. 이 활동은 전국 1만1000여명의 프레시 매니저 네트워크가 있기에 가능하다. 프레시 매니저들은 매일 유제품을 전달하며 홀로 지내는 노인의 건강과 안전을 확인한다. 홀몸노인의 건강이나 생활에 이상을 발견하는 즉시 주민 센터와 119 긴급신고를 통해 필요한 도움을 받도록 돕는다.
윤 회장이 2010년 사재를 털어 설립한 ‘우덕윤덕병재단’은 지금까지 꾸준히 저소득층 자녀의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 사업에도 공을 쏟았다. 1979년부터 최근까지 ‘전국 학생 과학 발명품 경진대회’를 후원했고 ‘전국 어린이 건강 글짓기 대회’와 ‘유산균과 건강 국제학술 심포지엄’ 등 다양한 교육 학술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속적인 나눔을 실천한 노력을 인정받은 윤 회장은 1988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2년 보건대상 공로상, 2008년 한국경영인협회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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