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25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났다.
1964년 6세 때 ‘잭슨5’ 리드보컬로 데뷔한 마이클 잭슨은 음악에 대한 뛰어난 천재성을 보이며 단숨에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룹 활동 이후 솔로로 전향한 마이클 잭슨은 팝 음악과 알앤비 음악의 흐름을 바꾸며 전 세계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고 팝의 황제라는 타이틀까지 획득했다.
화려한 스타의 삶을 살았던 그는 2009년 6월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노스캐롤우드 자택에서 프로포폴과 벤조디아제핀 급성 중독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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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 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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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은 가수, 작곡, 음악 프로듀서, 춤 등 다방면의 재능을 보이며 20세기 전 세계 대중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흑인은 소울과 알앤비 음악, 백인은 록·팝 음악이라는 암묵적인 공식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공식을 깨며 알앤비, 팝 등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소화해내 팝의 황제라 불렸다.
마이클 잭슨은 음악뿐만 아니라 린댄스, 문워크 등 자신만의 시그니처 춤을 선보였다. 또 1982년 ‘Beat It’, ‘Billie Jean’, ‘Thriller’ 등 수많은 명곡과 아울러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이라는 신세계를 열었다.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음악가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마이클 잭슨은 높은 앨범 판매량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정규 앨범 ‘Thriller’는 총 6600만장이 판매돼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마이클 잭슨은 전 세계 대중문화계에 한 획을 그은 아티스트지만 사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그는 지난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을 당했다. 법정 외 합의로 민사소송은 종결됐고 형사 수사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됐다. 또 2005년에도 그는 아동 성추행 혐의에 연루돼 재판받았다. 당시 재판에서도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마이클 잭슨은 평생 성형중독이라는 편견과도 싸웠다. 그는 1979년 무대 바닥에 부딪혀 코 성형수술을 받았다. 다만 그의 주변인 증언에 따르면 치료를 목적으로 받았지만 평소에도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몇번의 코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성형중독이라 오해받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피부색이었다. 흑인인 그가 백인처럼 보이는 건 수술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돌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이클 잭슨은 백반증으로 인해 피부색이 하얗게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이클 잭슨은 화려하면서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다사다난한 스타의 삶을 살았던 그는 죽음마저도 이슈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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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원인 놓고 설왕설래… 그는 살해 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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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에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심지어 그는 2009년 7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있을 컴백 콘서트를 준비 중이었기에 그를 기다렸던 팬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은 프로포폴과 벤조디아제핀 급성 중독이었다. 그의 개인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가 잭슨의 방에서 맥박이 약한 채 숨을 쉬지 않는 그를 발견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으나 소용없었다. 이에 경비가 911로 전화해 구급대원의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마이클 잭슨은 로널드 레이건 UCLA 메디컬 센터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관은 2009년 8월28일 그의 죽음을 살인으로 결론 내렸다. 마이클 잭슨이 불면증 해소를 위해 과도한 약물 의존 증세를 보였음에도 머레이가 약물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머레이는 2011년 과실치사로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성실 수형으로 2년만 복역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기 위해 2009년 7월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공개 추도식이 진행됐다. 스테이플스 센터는 그가 죽기 전날(2009년 6월24일) 밤 런던 콘서트를 위해 리허설을 진행한 곳이었다. 공개 추모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고 약 10억명의 팬이 방송을 통해 그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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