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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청년 두뇌들의 ‘탈(脫)한국’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코로나19 기간에 감소했던 미국 유학생이 다시 급증하는가 하면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이공계를 중심으로 학부생 이상 고급 인재들의 유출 현상도 가속화하고 있다. 가뜩이나 전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청년 인재 유출 속도마저 빨라져 기업들까지 활력을 잃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24일 미국 국제교육연구소(IIE)에 따르면 2022~2023학년도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은 4만 3850명으로 전년(4만 750명) 대비 8% 가까이 증가했다. 코로나19 기간에 유학생 수가 줄어든 기저 효과의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학령인구가 지속적으로 급감하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전체 유학생 숫자가 다시 상승 곡선을 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조기 유학생 비중은 일명 ‘기러기 아빠’를 양산하며 사회적 문제로까지 떠올랐던 2006년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를 나타냈었다.
일단 국내에서 대학에 입학한 뒤 유학을 가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특히 이공계 분야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2022년 기준 한국을 떠난 학부 과정 이상 이공계 대학·대학원생 수는 3만 1000명에 달했다.
이처럼 두뇌 유출이 가속화되는 데는 국내 대기업, 특히 제조 대기업에 대한 취업 유인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근본적 원인이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제조업에 대한 매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창업 2세대에 속하는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MZ세대들은 기본적으로 앞선 세대보다 영어에 능통할뿐더러 국가에 대한 로열티(충성심)도 약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며 “향후 이들이 더 나은 처우, 더 나은 기회를 찾아 해외로 집단 탈출하면 국가 전체의 경쟁력이 후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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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쇠퇴의 조짐은 이미 기업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삼성전자·LG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 등 국내 매출 상위 10위 기업 임직원의 연령 실태를 분석한 결과 2022년 기준 국내 사업장 전체 임직원 중 50대 이상(삼성전자는 40대 이상)은 15만 287명으로 27.3%에 달했다. 이는 2020년 12만 6054명(23.2%)과 비교해 4%포인트 이상 늘어난 수치다. 차기 대선에서 정년연장이 공약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업의 노화 현상은 앞으로 더 가속화될 공산이 크다.
국가 경제를 이끌어야 할 기업들이 늙어가고 있는 사이 해외 기업들은 막대한 연봉과 복지를 앞세워 국내 두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엔비디아나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미국 빅테크들의 석박사 졸업생 초봉은 30만~40만 달러(약 4억 2000만~5억 5000만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급여의 절반을 주식으로 받는 엔비디아 직원의 상당수는 최근 주가 폭등으로 대부분이 이미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 기업들이 해외 인재는 꿈도 꾸지 못하고 국내 인재 채용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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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반도체 기업의 인사 담당 관계자는 “최상위 인재는 의대로 빠져나가고 이공계 인재 중에서도 에이스급은 미국 기업과 투트랙으로 입사를 알아보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학생들이 아예 전공을 포기해버리는 조선업과 비교하면 그나마 반도체 업종의 사정이 낫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대 조선학과 졸업생 46명 중 조선소에 취업한 사람은 3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생존을 건 글로벌 인재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정부 지원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이 고용을 늘릴 경우 세금을 깎아주는 ‘고용세액공제’를 보면 대기업은 사실상 혜택을 받기 어렵거나 세액공제 금액이 낮은 구조로 설계돼 있다. 지방 기업의 고용세액공제 규모가 더 크게 짜인 것도 실정과 동떨어진 제도라는 의견이 많다.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청년들이 수도권 기업에 취업하기를 원하는데 지방 기업에 혜택이 더 가도록 제도가 만들어져 있어 실질적 효과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국내 대학들 역시 수도권 규제에 묶여 AI나 반도체 같은 필수 학과의 정원을 늘리는 데 고충을 겪고 있다. 국가 연구개발(R&D)에 직접 참여하는 이공계 대학생들에게 월 100만 원 안팎의 보조금을 주는 ‘스타이펜드’ 제도를 적용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있다.
손지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기획조정본부장은 “첨단전략기술 분야에서 인력 부족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국가 경쟁력 퇴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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