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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라는 초일류 기업을 이끌며 무려 8년을 싸워 무죄를 선고 받았는데, 이제 또다시 시작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옭아맨 경영권 부정승계 혐의 재판 항소심 얘기다. 1심 재판부가 이 회장에 대한 혐의 전부를 무죄로 판단했지만, 검찰이 2000건 넘는 새 증거를 들이밀면서 또다시 지리한 마라톤 재판을 예고했다.
대만 TSMC, 미국 인텔, 일본 라피더스 등과 첨예한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있고 AI 산업 핵심 중 하나인 HBM 주도권도 경쟁사와 다투고 있다. 애플과는 가장 트렌디한 스마트폰 시장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다. 일개기업이 감당하기엔 벅찰 정도의 국가경제 명운을 건 격전이 벌어지면서 파격적인 범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커져간다.
온 전력을 다해도 부족할 격동의 시기, 수장은 서초동 공판장에 또다시 출석하며 발목이 잡힐 위기다. 이 회장은 지난달 31일부터 미국 동·서부를 가로지르는 2주간의 출장에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 잇따라 만나 미래 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이제 재판이 본격화 하면 이 회장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좁혀진다. 사법리스크가 또다시 삼성을, 우리 경제를 흔든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재판 출석만 96회…글로벌 리더 옭아맨 ‘사법 족쇄‘
24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최근 글로벌 경영 일정을 ‘부당 합병·회계 부정’ 혐의 사건 항소심 일정과 맞추는 방안을 또 다시 검토하고 있다. 이 회장이 1심에서 제기된 19개 혐의 모두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검찰의 항소로 수차례에 걸쳐 재판에 참석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경영 일정이 법정에 출석해야 하는 재판을 중심으로 짜이면서 글로벌 경영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동안 이 회장은 ‘1등 기업’이라는 이유로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정농단 사건으로 복역했고, 참여연대 등 반(反)시장 성향 시민단체의 고발로 부당 합병·회계 부정 혐의를 받으며 경영 보폭이 제한됐다. 실제 이 회장은 2021년 4월부터 1심 선고까지 2년 10개월 간 ‘사법 족쇄’가 채워진 채 96회나 법정에 나왔다. 이 회장은 지난 2022년 회장 취임 첫날과 2023년 취임 1주년에도 법원에 출석해야 했다.
글로벌 경영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 회장은 법원이 쉬는 명절 기간을 이용하거나 재판부로부터 불출석 허가서를 받아야 해외 현장경영에 나설 수 있었다. 이 회장은 1심 무죄를 받은 다음날인 지난 2월 6일 곧장 아랍에미레이트(UAE) 등 중동 국가 출장길에 올랐다. 최종 완공을 앞둔 바라카 원자력 발전소 현장을 점검하고 중동 네트워크 복원에 나서는 등 국가적 역량이 집중된 경제 이슈까지도 재판 일정을 고려해야 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에도 4월 20일부터 22일 간의 미국 출장에서 AI, 바이오, 차세대 모빌리티 등을 주도하는 글로벌 기업 CEO 20여 명과 네트워크를 다졌다. 당시 이 회장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횡단하며 구글, MS, 존슨앤존슨 등의 글로벌 기업 CEO를 만났다. 재판 일정과 맞물린 출장 기간 동안에 최대한 촘촘한 시간표를 만들어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한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이 회장은 매주 목요일 재판에 참석하면서 업계에서는 ‘서초 족쇄’에 묶였다고 할 정도였다”면서 “국내 1위이자 글로벌 기업의 리더가 해외 파트너 방한을 비롯한 주요 사업 미팅 일정 조율에도 제약이 많아 경영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1심서 부담 덜어내고 ‘JY의 뉴삼성’ 기대감 키워
이 회장의 재판 일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월 이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장을 제출했다. 1심 선고까지 3년 5개월이 걸린 법정 시간표를 고려하면 이 회장은 앞으로 2년가량 항소심 재판에 출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2심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고법 재판부가 당분간 새로운 사건을 맡지 않기로 하면서 1심 보다 빠른 ‘속전속결’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앞서 이 회장은 2020년 9월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과정에서 최소비용으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승계하고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미래전략실이 추진한 각종 부정 거래와 시세 조종, 회계 부정 등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는 이 회장의 19개 혐의 모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19:0’으로 완패하는 사건은 흔치 않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었다.
검찰의 항소로 사법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있어 최후의 관문으로 여겨졌던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 대한 정당성을 1심에서 인정받으면서 짊어진 부담도 한층 덜게 됐다.
현재 삼성전자를 둘러싼 글로벌 반도체 시장 분위기를 보면, 사법리스크가 끼어들 틈이 없다고 업계는 입을 모으고 있다. 삼성전자는 31년 전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다시 꺼내야할 만큼 전례 없는 글로벌 위기의 파고를 마주하고 있다.
◇”기업경쟁력 훼손은 국가 손실, 결국 국민이 부담”
재계에서는 1심에서 부담을 덜어낸 이 회장이 2심 재판 중에는 특유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협력 모델 구축과 미래 먹거리 발굴 등에 적극 나서면서 그동안 더디게 돌았던 ‘뉴삼성’ 시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을 것이란 전망이다.
이와 함께 대규모 투자 결정이나 인수·합병(M&A) 등에도 시동이 걸릴 것이란 기대감도 큰 상태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AI, 바이오, 전장, 로봇 등의 분야에서 M&A 등 기업 간 합종연횡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삼성은 ‘의사결정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삼성의 마지막 대형 M&A가 7년 전인 2017년 미국 전장업체 하만 인수였을 정도다. 업계에선 최고 결정권자를 옭아맨 사법리스크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 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난 직후인 2021년 8월 향후 3년간 240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초대형 투자 계획을 발표한 점 등을 감안하면 조만간 대형 투자 계획이 나올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전망이다. 실제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도 올해 초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삼성의 리더십을 위한 대형 M&A 계획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재용 회장은 1심 재판에 총 96회 출석하면서 모든 일정은 재판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사법 리스크가 지속되는 한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면서 “경영의 요체는 ‘의사결정’이다. 제때 필요한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기업경쟁력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그 자체가 국가손실이고 결국은 국민이 떠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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