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강 하구 남쪽 끝에 자리잡은 더 플루턴 호텔 옆으로 이어진 금융가는 24시간 밝은 빛을 낸다. 싱가포르는 다인종 국가인 만큼 아침시간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금융가 거리의 직장인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피부색을 가졌다. 저녁 시간이 되면 수백명의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온다. 퇴근 후 모인 웨스턴 식당에선 어울려 맥주와 식사를 즐기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히잡을 쓰고 바쁘게 음식을 나르는 직원의 모습 역시 싱가포르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퇴근 후 직장인들이 모인 야외 테라스 파라솔 지붕 위로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의 트레이드마크가 빛난다. 2012년 완공된 싱가포르의 네 번째 국제금융센터(IFC)인 이곳에는 스탠다드차타드를 비롯해 싱가포르개발은행(DBS), 바클레이스, 웰링턴자산운용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금융사들과 다국적 기업 사무실이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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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홍콩 대체지 아닌 또 다른 글로벌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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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금융서비스는 국내총생산(GDP)의 12.25%(2022년 기준)를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핵심 산업이다. 지난해 말 현재 싱가포르에서 영업하는 은행 123곳 중 외국계 법인·지점은 117개. 싱가포르강 하구를 중심으로 한 래플즈키·로빈슨로드 등의 거리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600여개 금융기관이 성업하는 세계적인 금융가다. 싱가포르는 세계경제포럼(WEF) 등 각종 기관들이 선정한 런던·뉴욕·홍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4대 허브다.
이달 초 싱가포르 금융가 원 조지 스트리트에서 만난 정형돈 신한은행 지점장은 “금융 허브였던 홍콩이 중국화하면서 금융사들이 싱가포르로 많이 넘어왔다. 지난해 로레알 등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 지사가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이전하면서 관련 금융사들이 따라왔다”며 “그 결과 싱가포르 달러화가 강세를 유지하고 금융업이 활황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홍콩이 중국 본토 진출을 위한 발판이라면 싱가포르는 글로벌 시장 공략을 위해 필요한 요충지”라며 “싱가포르는 홍콩의 대체국가가 아닌 차별화 된 경쟁력으로 또 하나의 금융허브로서의 역할을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고 기대했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금융위기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경제의 급성장이라는 순풍을 타고 아시아에 국한된 지역 허브에서 글로벌 허브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글로벌 3대 오일허브이자 물동량 2위를 자랑하는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의 중계무역항이라는 이점을 토대로 글로벌 진출 교두보 역할을 맡고 있다.
오현석 이지스자산운용 아시아 대표는 “중국 본토에 면한 홍콩과의 경쟁을 펼칠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사실상 싱가포르는 홍콩을 대체할 국가가 아니라 금융허브의 한 거점으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싱가포르는 안정적이고 투명한 국가 이미지 덕분에 대부분 글로벌 출자자들이 싱가포르에서 설립된 펀드를 케이맨 제도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다른 역외 금융센터에서 설립된 펀드보다 조금 더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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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인프라 확대 집중” 국가역량 총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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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의 금융산업 성공은 적도의 불모지라는 현실에 맞서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문화적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국가역량을 집중한 결과로 평가된다. 싱가포르의 수준 높은 인프라는 한국 금융업계가 선진화 모델로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영어 공용화 정책에 힘입어 영어 구사 인구가 80%에 육박하면서도 중국어권 인구가 70%를 넘는 점은 싱가포르의 가장 큰 이점이다.
홍콩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싱가포르 현지 금융업계에서 재직 중인 안혜진(31)씨는 “홍콩은 본토 출신 인구의 유입이 늘면서 영어 사용 인구가 줄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싱가포르는 기본적으로 영어를 쓰는 나라지만 이른바 싱가포르 특유 영어법인 ‘싱글리시’를 사용하면서 인도, 중국 등 모든 국가의 영어 발음을 알아듣고 소통하면서 동서양의 중계지와 글로벌 진출의 관문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실제 국내 금융사들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등으로 진출을 계획할 때 한국에서 직접 현지로 진출하는 것보다 싱가포르를 통해서 진출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현재 NH농협은행도 싱가포르에 법인 설립을 계획하고 글로벌 사업 확대를 구상 중이다.
싱가포르에 법인을 둘 경우 싱가포르와 아세안 국가들과 협정이 많아 절차도 간편하다. 또한 다수의 글로벌 기업들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많은 정보가 오고간다는 장점과 낮은 세금 등 비용면에서도 경쟁력을 갖췄다.
이 같은 장점으로 싱가포르 지점은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에 대한 기업금융(IB)을 전담하고 있다.실제 미래에셋증권이 인도 현지 증권사 쉐어칸(Sharekhan Limited)사를 인수할 당시에도 싱가포르 법인이 인수 딜을 주관하는 등 매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준엽 미래에셋증권 싱가포르 법인 대표는 “싱가포르는 정치적으로 중립국인데다 지난 50년간 정권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자연재해도 없다”며 “투자금도 풍부하고 금융도 잘 발전해 있으니 안정성이 높아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지사를 싱가포르에 두는 글로벌 기업은 앞으로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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