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언론사 논조 및 편집방향과 무관합니다.
◆블랙리스트 또는 화이트리스트
한동안 나라 안과 밖을 시끄럽게 했던 소위 ‘블랙리스트’(Blacklist)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대개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박근혜 정부 시절 일로 치부하고, 문재인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공동위원장 도종환·신학철, 2017.7.31.~2018.6.30)를 두고 1년여를 조사해 그 결과를 본 책 총 4권, 부록 6권으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를 펴냈다.
하지만 당시 약 2년여 넘게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는 백서 발간과 함께 매우 근본적인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책임 있는 조치로 이어질 것처럼 공언했지만 결과는 ‘용두사미’였다. 백서를 본 사람들의 결론을 내려놓고 조사를 했다는 의견이 만만찮은 것을 보면 조사의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조사와 보고서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특히 조사대상자들에게 조사 결과에 대한 동의나 조사 결과조차 알려주지 않은 일방적인 조사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이후 가시적인 조치나 또는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개선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지않은 예산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조사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또 조사가 오직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한정해 이루어졌다는 점도 이 조사가 또 하나의 블랙리스트였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는 점도 조사의 한계다.
사실 블랙리스트는 특정 특권, 서비스, 이동성, 접근 또는 인정이 거부된 단체나 사람의 목록 또는 명단을 말한다. 사전에 따르면 동사로서 누군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은 특정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부정되거나 사회의 특정한 영역에서 배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블랙리스트란 말은 1649년 자신의 아버지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와 법원 관리 58인의 명단을 작성한 영국의 찰스 2세의 목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1660년 왕위에 오른 그는 13명을 처형하고 25명에게는 종신형을 내렸다고 한다.
일명 살생부라고도 하는 블랙리스트 중 유명한 나치의 영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강제수용소로 보낼 인사들의 명단 2820명의 이름이 기록된 ‘블랙북’(Black book)은 유명하다. 또 1947년 미국 하원의 반미활동위원회가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이런 이념적 성향을 지닌 시나리오 작가와 기타 할리우드 영화전문가들의 취업을 제한하기 위해 작성한 리스트도 유명하다. 물론 할리우드 리스트에 오른 151명의 연예 전문가 명단은 196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실제로 이들 영화인은 수년 간 가명으로 활동함으로써 크게 위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어느 정부라 하더라도 자신의 지지자와 반대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권리가 있다해도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블랙리스트도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블랙리스트의 반대인 화이트 리스트도 물론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블랙리스트를 서로에게 유리하게 적용해서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만 했을 뿐 이를 원천적으로 막을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쉽다.
◆팔길이 원칙
사실 블랙리스트 또는 화이트리스트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블랙리스트는 존재했고, 이 문제는 기회의 박탈 또는 불공정이란 점에서 언제나 어느 때나 척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블랙 또는 화이트리스트 사건은 그 사건의 역사와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사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미국에서도 블랙 또는 화이트 리스트에 관한 사건은 최근까지도 존재했다. 그리고 이들 나라는 이를 저지하고 막을 많은 수단과 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인간이 고안한 제도 중 완벽한 것은 없다. 이는 ‘팔길이 원칙’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오늘날 팔길이 원칙에 관한 논리적 인 타당성이나 현실적인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많다. 팔길이 원칙에는 두 가지 절대 명제가 작용한다. 우선 ‘정부는 문화・예술을 지원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부는 문화・예술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여전히 과연 문화와 예술은 사회적으로 지원받을 마땅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답이 필요하다. 또 시장은 문화와 예술 진흥에 실패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와 예술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돈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다.
또 ‘간섭하지 읺아야 한다’는 명제를 위해서는 팔길이 기관의 자율성은 보조금 배분을 합리적으로 하고 있는가, 지원금 즉 공금 사용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또 누구의 자율성이 중요한가라는 점이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들의 대답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팔길이 원칙이 모든 사실의 정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편파적인 지원과 배제가 존재했고 소위 코드인사라는 말로 블랙리스트가 정당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정부건 어느 진영이건 이런 블랙리스트 또는 화이트 리스트를 원천 봉쇄할 행동은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란 말의 원조 격인 영국은 코드인사의 또 다른 버전인 블랙리스트의 폐해를 막고자 노력했다. 특히 기호나 취미의 문제로 정량적 평가가 어려워 서열화할 수 없는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는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가 되었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을 두고도 전 세계 문화예술계는 서로의 물러설 수 없는 주장을 통해 또 다른 전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좀처럼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한 팔길이 원칙을 강조한 나머지 지원금을 수령하고도 이를 정산하거나 회계보고 조차 부 정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는 팔길이 원칙이 ‘방종’을 넘어 ‘조방적’인 행위라 할 것이다.
따라서 지원에 따른 공적 자금의 사용에 대한 투명성을 강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예술가들이 지원받은 자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면, 이를 통해 예술가들의 자율성도 존중받으면서 공적 자금의 효율적인 사용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들 스스로가 참여하는 감사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아무튼 예술가들의 자율성과 공적 지원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그래서 고안된 것 중 하나가 각기 법인격을 갖는 비부처공공기관으로서 독립공공기관의 거버넌스를 갖추는 것이다.
◆‘팔길이 원칙’과 ‘독립공공기관’(QUANGO)
그리고 이는 예술가 집단이 국가의 일방적 주도로 이루어지는 예술 지원에 대한 불신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팔길이 원칙은 예술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한편 예술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며 예술에 관한 지원은 예술 전문가의 조언에 바탕을 둔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팔길이 원칙은 예술의 엘리트주의를 촉진해, 대중의 접근과 감상이 어려운 예술에 지원할 수 있는 위험과 함께, 문화예술에 대한 개인이나 기업의 지원을 제한해 재원의 다양성이 훼손될 여지가 있고 때로는 정부가 간섭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한계로 들기도 한다. 물론 팔길이 원칙의 실효성에 대한 논의와 논쟁도 있다. 완벽한 제도한 인간의 상상속에서 만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칙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태도와 책임감도 중요한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팔길이 원칙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는 공적 지원을 빌미로 권력자가 의도하는 예술을 유도하거나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취지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팔길이 원칙은 예술위원회가 중앙정부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고 존재하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아닌 의회에 책임지는, 하지만 의회의 정치적 영향력은 최소한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매년 의회로부터 문화예술기관이나 단체를 위해 국가 또는 복권기금에서 기금을 받아 예술가, 단체, 행사 등을 지원하는 예술위원회는 이후 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이런 ‘거리 두기’를 통해 예술위원회는 정치적으로 부당한 영향력이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업무를 운영할 수 있다. 또 정부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도 예술을 장려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술위원회와 예술을 정부로부터 멀리 두는 것은 국가가 승인한 예술 창작, 예술에 대한 정치적 검열 및 기타 해악으로 보호하는 장치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문화, 법률, 정치, 경제 분야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 유럽 국가들이 채택한 공공 정책의 원리였다. 사실 이런 원칙이 도입된 배경에는 소위 블랙리스트 또는 화이트리스트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방증이다.
◆비부처 공공기관(NDPB·Non Departmental Public Bodies)
우리나라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설립한 공립문화재단과 지방정부의 관계가 바로 이런 ‘팔길이 원칙’이 적용되는 ‘독립공공기관’(QUANGO)이지만 실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하청 업체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여전히 ‘팔길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블랙리스트의 문제점을 익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소하고 방지할 제도에는 무관심 해왔다. 이렇게 팔길이 원칙을 말하면서도 이를 지키고 실천하는 일은 게을리해 왔던 것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블랙리스트를 실행에 옮기거나 자신들의 진영이나 조직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방편으로 문화예술지원정책이나 지원금을 활용하려고 이를 개선하거나 혁신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지원이란 수단을 통해 간섭하고 강요하는 불필요하지만, 불가피한 차별과 불공정의 수단은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시정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다.
이는 1946년 영국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 ACE)를 만들 때 생겨난 말로 예술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지원하는 행정부와 예술계는 ‘팔 길이’만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따라서 이 원칙은 때로는 준정부조직 또는 준 자율적 비정부 조직이라는 의미의 ‘독립공공기관’(QUANGO, Quasi-Autonomous NGO)라고도 한다.
팔길이 원칙의 종주국 영국이 이런 원칙을 고안한 것은, 그들도 블랙리스트니 화이트리스트로 인해 많은 정치 경제적 손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팔길이 원칙을 실현하고자 만든 제도가 ‘비부처 공공기관’(NDPB, Non Departmental Public Bodies)이다. 비 부처 공공기관은 행정적으로 분류된 정부(ALB, Arm’s Length Bodies)의 하나로 정부의 역할을 하지만 정부의 특정 부처나 장관에게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기관을 말한다.
따라서 특정 장관은 비부처 공공기관에 대해 의회에 책임을 지지만, 비부처 공공기관은 해당 부처 장관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적인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중앙정부와 협력하는 관계다. 이는 공공기관이 자체 경영혁신을 통해 효율적이고 투명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책임성 있는 경영을 추구하면서도 중앙정부의 지휘 통제 또는 감독을 받지 않고 정책 목표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취한다.
영국의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문화예술기관은 비 부처 공공기관으로 미술관 박물관의 경우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ies),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제국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빅토리아 & 알버트 미술관(V&A),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을 포함한 16개의 뮤지엄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문화, 미디어 및 스포츠부에서 공적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무료입장을 대가로 부가가치세(VAT)를 환급받는다.
이들 비부처공공기관은 정부에 속하지는 않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 실행을 위해 일을 하지만, 자체적으로 결정하며 더 큰 독립성을 가진 공공 조직으로 일반적으로 법률에 따라 설립되며, 의회에 책임을 진다. 이런 구조는 재정적인 독립성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정부는 기본적으로 비부처공공기관이 원만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자금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법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비판적인 이들은 대부분의 비부처공공기관(NDPB)가 선거나 국민과의 협의 없이 정부의 장관이 위원들을 직접 임명하기 때문에 시스템이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자 1995년 처음 보고된 공적 생활 표준 위원회(Nolan Committee)가 구성되어 위원 임명 시 적절한 기준이 충족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공적 임명 위원’의 창설을 권장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노동당은 비부처공공기관의 수와 권한을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 집권 노동당 정부(1997~2010)년 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체할 제도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국가재정이 악화되면서 2010년 비 부처공공기관의 일부를 민영화하는 일이 더 큰 문제로 대두했다.
하지만 비 부처 공공기관으로서 박물관 미술관의 ‘비영리적 공공기관으로서 항구적인 시설’인 박물관 미술관 중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ies),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빅토리아 & 앨버트 미술관(V&A) 그리고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을 포함한 16개의 미술관 박물관은 여전히 비부처공공기관으로 유지되고 있다. 영국의 문화예술기관의 팔길이 원칙아래 운영되는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비부처공공기관과 같은 성격의 기관으로는 독일의 공법재단(öffentlich-rechtlichen Stiftung)이나 프랑스의 ‘행정적 성격의 공공기관’(EPA, établissement public national à caractère administratif)이나 루브르 같은 공공기관 루브르(EPML, Établissement public du musée du Louvre) 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입으로만 팔길이 원칙을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개입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문화예술정책의 실현을 위해 그리고 원천적으로 블랙리스트 또는 화이트 리스트 사태를 배제해 다시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명실공히 민간의 자율에 위임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먼저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국립현대미술관이라도 비부처공공기관으로 바꾸는 거버넌스(Governance) 변화가 시급하다. 말로만 블랙리스트를, 팔길이 원칙을 떠들면서 호들갑 떨지 말고 근본적인 대책을 도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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