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女風)’, ‘우먼파워(Woman Power)’.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의 활약상을 일컫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남성들만의 분야로 여겨온 여성 금기 분야에 진출한 여성이나 리더십을 지닌 여성 지도자의 사회적 영향력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대표적인 업권이 금융업이다. ‘방탄유리’라 불릴 정도로 보수적인 금융권에서 ‘최초’ ‘1호’ 타이틀을 단 여성 임원과 부서장 등 여성 인재의 활약으로 견고했던 틀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본지는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가 강한 금융권에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유리천장을 깬 여성 리더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성공 과정과 2030 여성 금융인 후배들에게 전하는 솔직 담백한 조언을 담고자 한다.
이형미 그룹장…중국‧홍콩 경험한 ‘스페셜리스트’
여성할당 아닌 단계별 데이터에 ‘집중’
“다양성‧포용성 등 기업문화가 정착돼야”
AI시대, 지속가능한 인력으로 살아남는 법 고민
“여성 임원 수를 늘리려면 최고경영진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할당이 아닌 데이터에 기반한 액션을 지속적으로 취해야 한다.”
홍콩, 중국 등 글로벌 시장에서 HR 제네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를 거쳐 ‘인사통’으로 불리는 이형미 SC제일은행 인사그룹장(전무)이 꼽은 조직이 ‘여성 리더’를 배출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 전무는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 중국에서 미래에 필요한 인력 구축을 위한 기본구조를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2021년부터 2개의 인재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인재 발탁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 전무는 여성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데이터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여성 임원을 최소 30%까지 올리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면, 여성 승진 비율을 매년 데이터로 뽑아야 한다”면서 “어느 단계에서 비율이 낮아지는지 분석하고 해당 단계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단언했다. 이어 “30%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하는 과정 속에 포용의 문화가 조성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은 육아휴직이 제도상으로 훌륭하게 갖춰져 있다고 평가한 이 전무는 해외의 경우 노동시장이 유연하고 이직이나 커리어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여성들이 휴직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문화를 꼽았다. 그는 “해외는 일터에 복귀한 후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생기면 편하게 회사에 얘기할 수 있다. 업무에만 지장이 없으면 관리자도 선뜻 집에 가라고 한다”면서 “다양한 환경에 대한 포용의 문화가 제도보다 여성들이 커리어를 쌓는데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대표적인 국가로 홍콩을 예로 들었다. 글로벌 금융 허브의 성격으로 운영되다 보니 우리나라보다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고민을 먼저 했다는 것. 이 전무는 “코로나19 때 홍콩에서 근무했는데 재택근무에 대한 기업과 관리자, 직원들의 태도가 유연했다”며 “재택근무를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까에 대한 고민이 없고 관리자의 얼굴을 몇 번 못 볼 정도로 근무여건이 자유로웠다”고 전했다.
2005년 3월 SC제일은행에 입행한 이 전무 역시 육아로 고민하던 날이 있었다. 치열하게 근무하면서도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 앞에선 다른 워킹맘과 똑같은 고민을 해야 했던 것.
이 전무는 “워킹맘이 느끼는 공통의 감정은 죄책감이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일에 대한 죄책감이 동시에 온다”면서 “퇴근할 때는 예전 같으면 조금 더 시간을 투자했을 텐데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업무를 좀 소홀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고, 출근길에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아이를 떼고 가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때마다 힘이 돼준 건 선배들의 조언이었다. 육아로 바쁜 시기가 완벽을 추구하는 업무 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그는 “커리어를 밟다 보면 긴 시간을 들여 하나의 업무를 완벽하게 끝내는 방식보다 빠르게 업무를 처리해 관리자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게 더 중요한 때가 온다. 육아 또한 엄마가 일을 다님으로써 아이가 독립심과 자립심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해줬다”며 “선배들의 조언은 멘탈 케어이자 정답이었다”고 했다.
이 전무가 생각한 임원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외에 가보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홍콩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처음 생겼다”며 “지나고 보니 용감했던 것 같다. 운도 좋았다. 좋은 자리가 있었고, 시기가 잘 맞아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 전무는 인사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 프로젝트 및 지리적 영역에서의 폭넓은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람, 팀 및 시장을 연결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지난해 배우자 출산휴가·입양휴가를 최대 100영업일로 확대하기도 했다. 시중은행을 포함해 국내 대기업 중 배우자 출산유급휴가를 100영업일까지 부여한 것은 SC제일은행이 처음이다.
이 전무는 “도입 당시 사내에서 논란이 있었다. 부장급에서는 인력 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라면서도 “스탠다드차타드그룹(SC)의 가치가 다양성과 포용성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도입했다. 나를 포함에 많은 직원들이 도입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SC그룹 기준 지난해 SC제일은행의 시니어리더 여성(상무보 이상) 비율은 27%다. SC그룹과 제일은행이 합병된 2005년 당시 고위급 여성 비율이 3%였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그는 “27%까지 끌어올린 데는 긴 시간 동안 경영진의 지속적인 관심이 한몫했다”고 말했다.
최근 그는 다가오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조직 안에서 지속가능한 인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이 전무는 “이제는 AI를 활용하는 능력이 경쟁력이 된다. AI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성과를 위해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서 “한국에서 만든 AI와 해외에서 만든 AI 등 다양하게 써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래에는 여성들이 가진 강점들이 빛을 발할 것으로 봤다. 이 전무는 “AI가 글도 쓰고 PPT도 만들어주고 리서치도 해주는데, 인간으로서 갖는 경쟁력은 뭘까 하는 고민들을 많이 하게 된다”면서 “여기서 부각되는 게 휴먼 스킬이다. 기계가 갖지 못하는 인간만의 강점이 결국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스킬이 될 것으로 본다. 여성의 공감능력과 경청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이모셔널 인텔리전스는 강점”이라고 밝혔다.
여성 후배들에게 주위를 둘러보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해볼 것을 조언했다. 성향상 여성은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는 “일도 잘하고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뛰어난데, 고위 관리자로 넘어가는 승진의 허들을 넘지 못할까 생각해보면 내 일만 잘하기 때문”이라면서 “팀으로서 협력을 끌어내고 많은 이해당사자들과 교류하는 게 필요하다. 이해당사자들의 지지를 얻어내려면 사회를 이해하는 인사이트가 필요해지는 시점이 있는데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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