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전지 소재 기업 천보가 3000억 원 규모의 리파이낸싱(자금을 새로 빌려 먼저 빌린 부채를 상환하는 것)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가 2년여 전 발행한 3000억 원 규모 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원금 상환 요구에 대비해 또다시 대규모 자금 조달에 나선 것이다.
최근 천보 주가는 CB·BW의 주식 전환가액보다 70% 넘게 떨어진 상태다. 사채권자들로선 주식 전환을 통한 시세 차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자도 없어 오는 12월부터 풋옵션(조기 상환 청구권) 행사가 가능해지면 하루라도 빨리 원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회사로선 조기 상환 압박이 큰 상황이다.
현재로선 천보가 새로 CB를 찍어 기존 CB를 상환하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존 사채 보유자들이 3년 가까이 이자 한 푼 못 받고 원금만 겨우 건지게 된 것과 달리, 새로 발행 예정인 CB엔 기관 투자자의 관심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차 업황 부진으로 흘러내린 현 주가가 바닥이란 판단이 일부 작용했다.
1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천보는 최근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3000억 원 상당 CB 발행을 위한 수요 조사를 진행 중이다. 새로 자금을 끌어와 2022년 2월 발행한 2500억 원 규모 CB와 500억 원 규모 BW를 상환하기 위해서다. 해당 CB와 BW의 만기는 5년이지만, 보유자는 오는 12월부터 발행사에 원금 조기 상환을 요구할 수 있다. 해당 CB엔 아우름자산운용·르네상스자산운용·타임폴리오자산운용·GVA자산운용·브레인자산운용·DS자산운용·안다자산운용 등 자산운용사, KB증권·미래에셋증권·교보증권·삼성증권·하나증권·IBK투자증권 등 증권사, KB캐피탈·IBK캐피탈·스톤브릿지벤처스 등 벤처캐피털이 펀드를 조성해 대거 투자했다. BW엔 NH투자증권과 브레인자산운용이 투자했다.
이들은 지난해 2월부터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거나(CB), 신주 인수권을 행사해 신주를 받을 수 있었다(BW). 그러나 누구도 주식 전환 청구권이나 신주 인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당시 주가가 25만 원 안팎으로, CB 전환가액과 BW 행사가액(모두 31만8150원)보다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CB나 BW는 정해둔 가격보다 주가가 오른 상태에서 권리를 행사해야 시세보다 싼값에 주식을 확보해 주가 차익을 볼 수 있다. CB·BW 모두 표면 이자율·만기 이자율 각 0%로 발행됐기 때문에 사채권자들이 만기까지 보유할 유인도 없다. 풋옵션 행사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이유다.
주주들은 빚을 내서 빚을 갚는 돌려막기 가능성을 탐탁지 않아 한다. 기존 주주에게 손을 벌리는 유상 증자 가능성은 더 우려한다. 반면 기관 투자자 사이에선 연내 추가 발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CB를 더 많이 배정받기 위해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상당수가 회사 측에 투자 의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는 그동안 주가가 크게 빠져 바닥을 찍은 것으로 봤다. 천보 주가는 2022년 4월 33만 원대를 찍은 후 내리 미끄러졌다. 최근 두 달간은 7만 원대에서 횡보 중이다.
천보 CB에 투자했던 한 운용사 관계자는 “몇 년 후엔 주가가 반등할 것 같다”며 “새 CB 물량을 받기 위해 쟁쟁한 곳들도 줄 서 있다”고 했다.
다만 천보가 2년 전만큼 유리한 조건에 CB나 BW를 발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있다. 당시는 이차전지 산업이 호황기를 맞았을 때다. 투자자들이 이차전지 관련 기업의 몸값을 후하게 쳐줬다. 천보는 당시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전환가액을 설정했고, 이자를 주지 않아도 됐으며, 주가가 하락할 경우 전환가액을 낮추는 조건(리픽싱)도 붙이지 않았다. 지금은 천보가 아쉬운 입장이기 때문에 자금줄인 투자자가 더 우위에 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천보는 이차전지 4대 핵심 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질·분리막) 중 하나인 전해질과 전해액 첨가제를 만드는 회사다. 전해액 첨가제 등 이차전지 소재 제품이 전체 매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천보는 이차전지 업황 부진이 지속되면서 대표 제품인 F전해질의 올해 생산능력(캐파)을 1만 톤에서 2500톤으로 낮추는 등 생산능력 증설 계획을 축소했다.
증권사 리서치센터들은 대체로 천보 주가 전망을 어둡게 보고 있다. 국내 증권사들은 올해 천보의 연간 영업손실 규모가 200억 원대로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회사가 지난달 ‘어닝 쇼크(실적이 예상보다 나쁘게 나온 것)’ 수준의 1분기 실적을 발표한 후, 분석 보고서를 발간한 6개 증권사 모두 목표주가를 낮췄다. 하이투자증권, 삼성증권 등은 매수가 아닌 ‘홀드’ 의견을 냈고, 목표주가도 현 주가와 큰 차이 없는 8만 원대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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