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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온과 리벨리온의 합병 추진은 국내 인공지능(AI) 반도체 팹리스 시장의 판도를 바꿀 만큼의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다. 최근 몇 년간 국내 AI 반도체 팹리스 시장은 기술력과 제품 완성도 측면에서 사피온과 리벨리온·퓨리오사AI 등 세 곳이 이끌어나가는 모양새였다. 이 세 곳 중 두 곳이 힘을 합치기로 한 만큼 앞으로 출범할 합병법인은 국내시장에서만큼은 확고한 강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피온과 리벨리온은 앞으로 2~3년이 우리나라가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봤다. 해외 빅테크들이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고 우수한 인력을 독식하는 상황에서 국내를 넘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합병을 통한 시너지 창출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두 회사가 공통적으로 신경망처리장치(NPU)를 개발하는 만큼 합병을 통한 기술적 시너지는 클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추론용이나 저전력 기술에 특화된 제품을 개발해나간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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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AI 작업을 위한 NPU 시장은 산업 전반에서 AI 접목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가트너에 따르면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올해 428억 달러(약 59조 원)를 기록한 후 4년 후인 2028년에는 1194억 달러(약 164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은 엔비디아가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아성을 깨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MS)·오픈AI·메타·아마존·애플 등이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에 뛰어든 상황이다. MS는 지난해 11월 연례 개발자 회의 ‘이그나이트 콘퍼런스’에서 자체 생산한 AI 반도체를 선보였다. 오픈AI는 AI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중동 지역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금 유치에 나섰으며, 메타는 최근 자체 개발 AI 반도체인 ‘MTIA’에 이어 2세대 제품인 ‘아르테미스’를 출시했다. 빅테크 기업 중 가장 먼저 AI 칩을 출시했던 구글은 최근 최신 칩을 자사의 대규모언어모델(LLM) ‘제미나이’에 적용했다.
사피온과 리벨리온이 최근 투자 유치에서 각각 8000억 원대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은 만큼 합병에 따른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면 빅테크에 맞서 경쟁력을 갖춘 AI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사피온의 모회사인 SK그룹과 리벨리온의 전략적투자자(SI)인 KT는 두 회사의 성장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실제로 KT는 리벨리온에 투자한 후 KT클라우드 산하 데이터센터에 리벨리온의 NPU 탑재를 결정하는 등 투자는 물론 제품 상용화도 지원했다. 사피온 역시 SK하이닉스로부터 D램을 원활히 공급받으면서 NPU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번 합병 추진 결정은 SK그룹과 KT가 글로벌 AI 인프라 전쟁에 나설 국가대표 기업을 만들겠다는 취지에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또 양 사에 투자했던 재무적투자자(FI)들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리벨리온과 사피온은 이번 합병 추진 발표 직전에 FI에 해당 내용을 공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투자자는 “두 회사가 그동안 한정된 시장에서 불필요한 경쟁을 펼친 것은 사실”이라면서 “또 두 회사는 AI 반도체 관련 인력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다양한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관건은 현재 두 회사가 진행 중인 3세대 NPU 개발의 성공 여부다. 리벨리온은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LLM 시장을 겨냥한 NPU ‘리벨’ 개발에 나섰으며 사피온도 차세대 NPU인 ‘X430’ 출시를 위한 적극적인 연구개발(R&D)을 추진하고 있었다. 리벨리온과 사피온이 합병을 결정한 만큼 두 회사의 기술력이 결합한 차세대 NPU 개발에는 더욱 속도가 붙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리벨리온은 해외 대형 기업들이 인수하고 싶어 했던 유망한 회사”라면서 “국내 기업들끼리 힘을 합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합병 추진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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