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이어온 레트로(Retro) 열풍이 자동차 업계에도 완전히 자리 잡았다. 자동차의 디지털화는 이미 달성했고 인공지능(AI)이 탑재되고 전기와 수소 등 동력원마저 바뀌는 상황에 과거의 멋과 분위기를 기념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하다. 단순히 옛것을 되살리거나 판매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경제가치를 창출하는 일종의 현상이자 활동이 됐다.
자동차업체들은 과거 인기를 끌었던 차종의 디자인을 모티브로 삼은 최신형 전기차를 내놓으면서 ‘헤리티지'(heritage·유산·遺産)를 재해석했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영광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레트로’의 의미 그대로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세대와 성별을 초월한 마케팅 활동도 가능해진다. 특히 젊은 세대는 레트로 감성을 개성으로 볼 뿐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쓰던 제품으로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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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관리한 역사, 마케팅 툴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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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동차 업계가 ‘레트로’ 전략을 펼 수 있었던 건 오랜 역사 덕분이다. 저마다 강조하는 헤리티지는 역사가 오래된 회사일수록 할 얘기가 많고 전략도 다양하게 펼칠 수 있어서다.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로 불리는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의 ‘페이턴트 모터바겐'(Patant Motor Wagen, 1886)은 등장한 지 벌써 138년이나 됐다.
프랑스 르노자동차도 125년 역사를 자랑하며 자동차에 있어 여러 혁신을 가져온 프랑스 시트로엥의 ‘트락숑 아방'(Traction Avant, 1933)도 100년이 넘었다. 독일 BMW 1916년, 영국 재규어도 1922년부터 역사가 시작됐다. 일본의 토요타자동차도 1937년부터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116년 역사의 미국 GM은 1908년부터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글로벌 완성차업체들은 박물관을 운영하며 과거의 영광을 보존하고 새로운 히스토리를 써내려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헤리티지 모델을 관리하는 건 기본, 주기적으로 테마를 달리하며 관람객들과의 소통도 이어가고 있다.
모터스포츠 역사도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의 오랜 유산이다. 신차를 내놓으면서 성능이 더 뛰어남을 강조했고 이를 겨루기 위해 시작한 게 자동차경주다. 압도적인 성능으로 경쟁자를 따돌린 모델의 경우 ‘전설’로 불렸다. 업체들은 신차를 내놓을 때 이런 점을 활용, 특정 디자인 요소를 재해석해 활약상을 기념하며 적통성과 우수성을 강조한다.
헤리티지를 강조하며 과거를 즐기는 축제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993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굿우드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가 대표적이다. 일반 도로나 자동차경주장 등에서 열리는 행사가 아니라 사유지에서 진행된다. 영국 웨스트 서식스의 대부호 프레드릭 리치몬드 경이 서킷을 만들었고 그의 손자 찰스 마치 경이 이를 개방, 자신의 컬렉션을 즐길 수 있는 이벤트를 연 것이 현재 축제로 이어졌다. 이 행사는 현재 완성차 업체들이 헤리티지 마케팅을 펼치는 최고의 장으로 꼽히는데 테스트카, 콘셉트카도 출품된다.
크레던스 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클래식카 시장은 2021년 311억달러(약 42조8247억원)에서 2028년 513억달러(약 70조6401억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클래식카 보험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리서치앤마켓치는 2022년 총 서면 보험료가 309억7000만달러로 평가됐지만 2029년에는 519억2000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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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티지 관심 보이기 시작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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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 역사는 70년이 채 되지 않는다. 6·25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자동차 역사가 시작됐다. 국제자동차가 미군이 해체한 지프 윌리스 MB의 부품을 활용, 조립한 ‘시발(始發)자동차’가 그 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회사로 성장한 현대자동차는 1967년 설립됐고 1976년 독자 모델 ‘포니’를 개발하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최근 들어 현대차그룹도 헤리티지 복원 사업에 힘을 주고 있다. 자동차 디자인계의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손으로 포니 쿠페 콘셉트카를 복원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포니의 시간’ 행사를 열기도 했다. 현대모터스튜디오도 운영하면서 브랜드 알리기에도 집중하고 있다.
국내 마케팅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국내 기업들이 현재와 미래에만 신경 쓰면서 과거의 흔적을 신경 쓰지 못했다”며 “100년 넘는 해외 기업들은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대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사람이 새로운 것을 접하면서 얻는 쾌감을 위해 더 큰 자극을 찾다 보면 오히려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며 “이런 이유로 사람은 변함없는 가치에 대한 갈망을 하게 되고 이를 활용하는 게 레트로 마케팅”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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