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색이 짙자 일본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일본군을 상대로 한 봉오동전투에서의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봉오동전투 승리는 몇 개월 뒤인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로 이어졌다. 봉오동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독립군 역사에 남을 만한 승리를 일궈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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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유인 성공… 지형 활용한 매복 작전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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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4일 독립군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북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했다. 당시는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여러 독립군 부대가 창설되면서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해진 시기였다.이 시기 강양동에서의 기습적인 공격은 일본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에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1개 중대를 급파해 반격에 나서면서 나흘간의 대전투로 이어졌다.
일본군은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했고 6월6일 밤 봉오동에 자리잡은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월강추격대대는 일본군 자료에 따르면 300~1000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6월4일 독립군의 습격은 단발적인 공격이 아닌 계획된 작전의 시작이었다. 대한군북로독군부 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골짜기에서 매복 작전을 계획했다. 매복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본 월강추격대대를 유인하는 중책은 이화일 당시 분대장이 맡았다. 이 분대장은 2019년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류준열이 연기한 주인공 이장하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 분대장은 소대를 이끌고 앞장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소대는 적극적인 교전으로 일본군을 속여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6월7일 오후 선발대를 시작으로 월강추격대대 본대까지 독립군 포위망에 들어오자 홍 장군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골짜기 3면에 매복한 700명가량의 독립군은 신호에 맞춰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3시간 이상 계속된 전투 끝에 사상자가 늘어나며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이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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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이끈 홍범도 장군… 육사 흉상 철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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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승리는 독립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산발적으로 형성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값진 경험이었다.독립군의 기세가 오르자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을 위한 고삐를 당겼다. 길림성에 주둔하던 홍범도 장군의 부대는 일제의 압력으로 중국 관청에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홍 장군은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로 이동해 김좌진 장군과 힘을 합쳐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했다. 청산리전투 승리는 봉오동전투 4개월 만에 일궈낸 또 한 번의 큰 성과였다.
봉오동전투 지휘권을 두고 홍 장군과 최진동 장군의 비중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두 독립운동가 모두 봉오동전투 승리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이후 홍 장군은 당시 소련 소속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정부는 2021년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추진했다. 당시 유해 봉환에는 배우 조진웅이 국민특사로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홍 장군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육군사관학교는 2018년 탄피 300㎏을 녹여 홍 장군을 비롯해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만들어 교내 충무관 앞에 설치했다. 그러나 설치 약 5년 만인 지난해 8월25일 육사는 교내 설치된 홍 장군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이유는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이었다. 홍 장군은 1027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은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을 억지하고 전시에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인데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며 홍 장군 흉상 철거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필요에 의한 행적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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