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IT 분야 기업 및 美 의회·정부 미팅 등 30건 일정 소화
불확실성 속 ‘승어부(勝於父)’ 이뤄낼지 관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신경영’ 31주년을 계기로 미국 전역을 도는 작심 출장에 나선 건 최근 직면한 위기 상황이 ‘신경영 선언’ 이전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6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뉴욕과 워싱턴DC 등 동부는 물론 서부의 실리콘밸리까지 모두 챙길 계획이다. 특히 세계 최대 이통사 버라이즌을 시작으로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관련 기업 최고경영자(CEO) 및 정관계 인사들과 릴레이 미팅에 나선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회장의 이번 미국 출장은 주요 고객사와의 협력 강화는 물론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라며 “매일 분 단위까지 나뉘는 빽빽한 일정 30여 건이 6월 중순까지 진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첫 번째로 미팅을 가진 버라이즌은 글로벌 통신 사업자 중 삼성전자의 최대 거래 업체다. 두 회사는 갤럭시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웨어러블 기기, 네트워크 장비 등에 걸쳐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버라이즌이 2020년에 체결한 ‘5G를 포함한 네트워크 장비 장기공급 계약’은 7조9000억 원 규모로, 한국 통신장비 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수출 계약으로 화제를 모았다. 삼성전자는 해당 수주를 계기로 미국 5G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와 버라이즌이 갤럭시 단말기부터 네트워크 장비까지 광범위하게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삼성전자의 앞선 기술력은 물론 이재용 회장과 베스트베리 CEO의 오래되고 각별한 인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회장과 베스트베리 CEO는 2010년 스페인에서 열린 ‘MWC 2010’에 각각 삼성전자 부사장과 스웨덴 통신기업 에릭슨 회장 자격으로 나란히 참석한 것을 계기로 10년 이상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베스트베리 CEO가 버라이즌으로 옮긴 뒤에도 이어져, 5G 분야의 대규모 장비 공급 계약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재용 회장은 출장 기간 반도체와 가전 공장 등을 가동하고 있는 미국 사업장도 찾아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현지 의회의 지원을 당부할 것으로 보인다. 현지 주요 고객사들과의 미팅도 예고돼 있다. 특히 젠슨 황 엔비다아 CEO와 이재용 회장의 만남이 이뤄질지 업계의 관심이 크다.
이번 출장을 계기로 이재용 회장이 선대 회장의 ‘신경영’의 뒤를 잇는 메시지를 내놓을지도 주목된다.
7일은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대변되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한 지 31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는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지만, 최근 상황은 심상치 않다.
먼저 글로벌 경기 침체,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커진 상태다. 주력이던 반도체 산업은 작년 15조 원에 육박하는 적자를 냈다. 게다가 AI 시장 확대로 수요가 급증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대응이 늦어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뺏겼다.
파운드리는 1위 업체인 대만 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고, 후발업체인 인텔에도 쫓기는 샌드위치 신세다.
스마트폰 분야에서는 출하량 1위를 되찾았지만, 프리미엄 폰에서는 아이폰에 크게 밀리는 형국이다. AI를 앞세워 TV와 가전 사업의 실적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긴 하지만, 1분기 영업이익에서 경쟁사 LG전자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삼성전자가 지난달 21일 이례적인 ‘원포인트’ 인사를 통해 반도체 사업 수장을 전영현 부회장으로 전격 교체한 것도 삼성전자의 위기의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은 지난달 29일 사상 처음으로 파업을 선언한 데 이어 첫 단체 행동으로 7일 연가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 전반에 걸친 이 같은 위기감은 아버지를 능가하겠다는 ‘승어부(勝於父)’를 다짐한 이재용 회장 앞에 놓인 과제”라며 “이 회장은 글로벌 복합 위기 속에서 삼성의 초격차 경쟁력을 회복하고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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