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다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번역가 조민영]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대원이 국경의 무너진 콘크리트 장벽 사이로 오토바이와 차량을 타거나 걸어서 유유히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곧이어 이들이 가옥으로 보이는 곳에 폭탄을 던져 넣거나, 총격을 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장한 하마스 대원이 이른 아침 이스라엘의 한 음악축제 현장에 난입해 민간인을 무차별 사살하기도 했다.
지난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침공하자 뉴스 보도 영상으로 이 같은 하마스 대원의 모습이 방영됐다. 이후 세계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이스라엘과 연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보복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봉쇄한 채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병원을 파괴하여 인도적 지원을 끊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학살을 전쟁 범죄로 보고 규탄했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동맹국 미국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바이든 정부의 이스라엘 지지를 비난하고,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유대인 하면 누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홀로코스트(대량 학살)를 떠올릴 정도로, 그들은 과거 나치 대학살의 피해자였다. 그런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또 다른 민족적 집단 학살인 ‘제노사이드’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전 세계가 각성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의 외교적 의의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 전면에 부각시킨 점이라는 얘기도 들려왔다.
나 역시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관련 책을 찾아보니, 유대계 작가가 쓴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쓴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은 팔레스타인계 미국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가 쓴 책이다. 그가 속한 할리디 가문 구성원들은 팔레스타인 정치, 사법, 외교, 언론계에 종사했고, 이 나라 운명을 결정지은 굵직한 사건 현장에 있었다.
이 책은 저자와 그 일족이 경험한 팔레스타인 저항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다. 이 증언은 이스라엘이 국가 선포 과정에서 누락시키고 삭제해버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소리다.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팔레스타인이 국가적 위상을 지닌 나라였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엄연히 고유 문화와 역사를 지닌 다수 민족이 살던 땅에 다른 민족이 나라를 건설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 과정이 ‘일제 강점’과 ‘민족 분단’이라는 고통과 아픔을 겪은 우리 역사와 너무나 닮았는데도 말이다.
이 책을 보면 할리디 가문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주요 인사도 우리 독립 운동가처럼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국가적 결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주변 아랍국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강대국을 등에 업고 계속해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끝없는 중동 분쟁 원인이 아랍인과 유대인 두 민족의 충돌이 아니라, 식민주의 기획이 낳은 비극의 산물이라고 본다. 과거에 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국제사회는 이제 ‘두 국가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의 궤적”을 그린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은 하마스 궤멸을 목표로 휴전을 거부한다. 두 국가 해법도, “평등과 정의의 경로만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저자의 제안도 약간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그럼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팔레스타인에서는 누군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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