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야구 팬을 해볼까?”
친구의 폭탄 발언에 모두 분주해집니다. 본인 팀으로 영입하기 위해서라고요? 아니요. 이 친구의 정신건강을 위해 ‘야구’에 발을 들이지 않길 바라는 진실한 마음들이죠.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단호하게 그 결정을 말리는데요. 이직을 준비할 때, 학교를 옮길 때만큼 신중해야 하다고 거듭 경고하죠. 그리고 말합니다. 나처럼은 되지 말라고요.
‘주변에 단 한 명도 행복한 야구 팬이 없다.’ 명언처럼 내려오는 이 말은 진짜 사실인데요. 물론 행복할 때도 있죠. 일희일비의 끝판왕이 바로 야구팬입니다. 전날에 행복했더라도 다음 날에 바로 울화통이 터지는 일상이 다반사인데요.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가장 속상한 건 선수들이라지만, 어찌 돈을 받고 경기를 하는 자와 내 돈과 시간을 들인 자의 ‘분노’가 같을 수 있을까요. 엄연히 다른 겁니다.
무려 9이닝. 공수교대가 이뤄지는 3시간이 넘는 기나긴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 정말 드문데요. 초반부터 내 팀이 큰 점수 차로 이기지 않는 이상, 몇 번이고 전원 버튼을 누르곤 하죠. 지켜보는 대신 외면하는 방법을 택하는 건데요. 이 와중에도 휴대전화 속 경기 기록을 계속 새로고침하며 혹시 모를 기대를 하는 ‘미련함’은 덤입니다.
왜 가운데 꽂힌 실투에는 고개 끄덕이더니 바깥쪽 공에는 헛스윙하는지, 머리 높이 오는 공에 배트를 휘두르는지, 땅으로 떨어지는 공에 배트가 왜 나가는지, 초구 병이 걸린 듯이 초구를 치는지, 혼자 죽지 왜 선행주자도 죽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대체 왜 그러는지 선수들 얼굴에 대고 묻고 싶은데요.
20명의 선수가 어떻게 공 하나 못 던지고, 못 치고, 못 잡는 건지 갑갑한 이 속을 어찌할 길이 없죠. 하지만 더 답답한 건 이 공놀이를 뭐가 좋다고 쳐다보고 있는 나 자신인데요. “다시는 안 본다”고 다짐하지만 선발 투수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1군 엔트리 등말소를 챙겨보고, 유망주의 선전을 기대하는 ‘바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큰 점수로 이겼을 때는 “꼭 이렇게 점수를 몰아서 내야 하냐. 점수 할부 좀 하자”고 화내고, 큰 점수로 졌을 때는 “너희가 프로냐. 해체해라”라고 화를 내죠. 작은 점수로 이겼을 때는 “꼭 이렇게 간당간당 이겨야 하냐. 좀 편하게 야구 좀 보자”고 화내고, 작은 점수로 졌을 때는 “이걸 지냐? 언제 이길래?”라고 화를 표출하는데요. 네, 이겨도 져도 화가 나는 스포츠임은 분명합니다.
다른 단체 종목 스포츠, 구기 종목 스포츠 중에서도 유달리 야구 팬들이 늘 화가 나 있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일단 경기 수가 다른 종목에 비해 월등히 많습니다. 정규 시즌 경기만 팀당 144경기에 달하죠. 그야말로 ‘화가 나는 날’의 빈도수가 높은 건데요. 프로축구 36경기, 프로농구 54경기, 프로배구 36경기(컵 대회는 제외)와 비교하면 무려 3배 이상 많죠.
3연전 중 2번을 이기는 ‘위닝시리즈’만 이어간다 해도 6일(월요일은 경기 없음) 중 이틀은 화가 나 있는 셈인데요. (물론 말도 안 되지만) 한 시즌 동안 위닝시리즈만 기록하더라도 1년에 48일이 화나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감정 기복의 극치를 보여주죠.
또 경기 빈도도 너무 잦은데요. 144경기를 하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일주일 중 6일이나 진행하기 때문에 매번 기분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는 거죠. 축구는 한 번 승리하게 되면 짧게는 3~4일, 길게는 일주일 동안 좋은 기분을 이어가지만, 야구는 단 하루뿐입니다. 여기다 연패를 하게 되면 전날의 분노가 가라앉기도 전에 더 큰 분노가 더해지게 되는데요. 그렇기에 항상 화가 나 있거나, 더 화가 나 있는 팬들로 비춰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설사 이겼다고 하더라도 경기 내용에 불만을 표하기도 하는데요. 어떻게든 골을 만들어 승리하면 되는 타 구기 종목과 달리 이닝별로, 공수교대별로 화날 포인트가 많은데요. 무려 9이닝이나 되는 경기인터라 심지어는 출전 선수 한 명 한 명별로 화를 내기도 하죠. 왜 저기서 실책을 범하는지, 저기서 실투하는지, 저기서 배트를 돌리는지, 왜 열심히 안 뛰는지 일명 ‘나노 단위’로 화가 오고 갑니다.
이 정도 되면 144경기를 실투와 실책 없는 경기를 하지 않는 이상 화를 안 낼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나마 위로가 되는 점이라면, 이 모든 화가 프로야구 10팀 모두 골고루 나눠 갖고 있다는 거죠. 모두 나름대로 ‘격한 화’를 표출하며, 고만고만한 싸움 중입니다.
그래도 꼴찌는 있고, 매번 하위 팀은 나오기 마련인데요. 이왕이면 확률이 더 높은 ‘잘하는 팀’을 응원하면 되지 않냐는 머글(지금은 야구 팬이 아닌 이를 뜻함)의 말은 그야말로 ‘뭘 모르는 소리’죠.
야구 응원팀은 ‘마법의 모자’가 조상과 연고지와 성향을 고려해 정해주는 거니깐요.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는 겁니다. 설사 꼴찌 팬이라는 비아냥을 듣더라도 팀 세탁은 죽어도 할 수 없죠. 선수들은 자유계약선수(FA)가 가능할지 몰라도 팬들에겐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팀 세탁은 매국과 같으니깐요. 화가 나다 못해 어지럽더라도 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애써 무적이 아니지만, 무적이라 외치고, 최강이 아니지만, 최강이라 외치며 ‘최면’을 걸고 있는데요. 행복하지 않지만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목청껏 소리 지르며 자신을 속이고 있죠.
이렇게 오늘도 화가 나 있는 팬들. 하지만 이 팬들이 없다면 프로야구는 존재할 수 없는데요. 남은 경기만이라도 무적과 최강을 외치는 팬들의 입이 부끄러워지지 않는 ‘이기는 경기’를 부디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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