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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17) 성안에 비바람 소리가 가득하네 – 만성풍우(滿城風雨)

아주경제 조회수  

유재혁 에세이스트
[유재혁 에세이스트]

북송 시절,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두 문우가 있었으니 한 사람은 쟝시(江西)성에 사는 사일(謝逸)이요, 다른 한 사람은 후베이(湖北)성에 사는 반대림(潘大臨)이다. 두 사람 모두 살림살이는 궁핍했지만 시를 잘 짓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루는 사일이 반대림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면서 최근 새로 지은 시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절친의 편지를 받고 기분이 좋아진 반대림이 즉시 답신을 보냈다. 

“바야흐로 시흥을 돋우는 가을 아닌가. 다만 늘 속된 일들이 심사를 어지럽혀 시흥을 깨뜨리는 게 안타깝네. 어제 한가로이 누워 있다가 숲에서 들려오는 비바람소리에 문득 시흥이 일어 흰 벽에 ‘만성풍우근중양(滿城風雨近重陽 – 성안에 비바람 소리가 가득하니 중양절이 가까워졌구나)’이라고 써내려갔지. 어떤가. 멋지지 않은가. 그런데 말일세. 이 시구를 막 쓰자마자 세리(稅吏)가 돌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바람에 샘솟던 시흥이 일시에 깨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이 한 구절밖에 보낼 수 없네.” 

이 이야기는 남송의 승려 혜홍(惠洪)이 지은 《냉재야화(冷齋夜話)》에 실려 있다. 반대림이 죽은 후 사일이 보관하던 친구의 시구를 세상에 공개하자 사람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달랑 한 줄에 불과한 미완성 시일망정 가을 비바람이 몰고 오는 스산함과 계절의 풍경을 생동감있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사일은 이 시구를 인용하여 ‘보망우반대림시(補亡友潘大臨詩)’ 세 수를 지어 망우의 시재(詩才)를 기렸다. 

‘만성풍우근중양’은 훗날 ‘만성풍우’라는 성어로 진화해 성안에 바람과 비가 가득한 가을 풍경을 의미하던 말에서 소문이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 또는 스캔들이나 사건 등으로 사회적 파문이 일고 시끌시끌해지는 경우를 일컫는 말로 자리잡았다. 성어 ‘회자인구(膾炙人口)’가 좋은 일에 쓰이는 반면 만성풍우는 주로 부정적인 경우에 쓰인다. 

중양절(음력 9월9일)이 오려면 아직 멀었건만 이른바 ‘3김 여사’ 스캔들의 비바람 소리가 온천지에 가득하다. 3백만 원짜리 명품백 수수의 죄가 크냐, 4억 원 가까운 혈세 낭비 단독 외유의 죄가 크냐, 아니면 수천만 원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법인카드 사적 유용죄가 크냐. 이를 놓고 정치권이 또 한바탕 요동치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 부인과 입법권을 거머쥐고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리는 거대야당 대표 부인 세 사람이 한묶음으로 엮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지켜보기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김건희 여사는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친분을 내세우고 접근한 친북 성향 목사가 인사청탁을 하면서 건넨 삼백만 원짜리 디올백을 덥석 받는 바람에 탈이 났다. 면담 중 국정개입성 발언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를 저열한 몰카 공작으로 규정짓고 그 흔한 사과 한 마디에도 인색했다. 총선을 망치고 나서야 사과했지만 버스 떠난 뒤 손 흔든 격이다. 비록 김여사가 사인(私人)이던 시절의 일이지만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김정숙 여사는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총 48회 외국 순방에 동행했다. 역대 영부인 중 최다 횟수다. 그런데 순방 때마다 세계적 관광명소 방문을 빼놓지 않았다. 급기야 ‘버킷리스트 순방’ 아니냐는 비판이 속출했고, 이를 다룬 칼럼을 쓴 언론사 논설위원과 소송전까지 벌였지만 패소했다. 버킷리스트 외유 의혹의 화룡점정은 2018년 대통령 휘장이 달린 전용기에 전속 요리사까지 대동하고 행차한 인도 단독 방문이다. 타지마할 앞에서 찍은 단독샷은 국민정서를 제대로 건드렸다.

김혜경 여사의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은 내용이 가장 저급하다. 남편의 법인카드로 초밥, 소고기, 과일 등 먹거리와 샴푸 같은 생필품 구입을 했다니 말이다. 법카 유용 건수는 언론에 확인된 것만 해도 최소 70~80건, 액수는 최소 700만~800만원에 달한다.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은 법카 유용을 김혜경 여사가 노비처럼 부리던 경기도청 5급 공무원 배모 씨의 개인적 일탈로 프레이밍하여 이 대표 부부에게 튀는 불똥을 차단하려 하지만 뜻대로 될지 지켜볼 일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부인의 인도 방문을 ‘영부인의 첫 단독 외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힘 배현진 의원이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직격했듯 국민 혈세가 4억원 가까이 들었고, 일행 36명이 먹은 기내식 비용만 6292만원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파문은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6292만원은 4인 가족의 5년치 식비에 해당한다.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해 버려 열람을 원천봉쇄한 고가의 명품옷들에 대한 의혹도 재점화 중이다. 3김 여사를 동시에 특검하자는 주장을 정략적 물타기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형국이다. 이래저래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 논란은 제 발등을 찍는 자충수요, 민주당에는 뼈아픈 이적수(利敵手)가 되고 말았다. ‘김건희 특검법’ 공세에 시달리던 여권이 ‘3김 여사 특검법’으로 반격의 기회를 잡았으니 말이다. 

중국인들에게 바람과 비, 즉 풍우는 위기다. 곧 닥칠지 모를 전란과 재난의 전조다. 변화의 조짐이기도 하다. 5월에 불기 시작한 비바람이 잦아들 줄 모른다. 권력자를 남편으로 둔 여인네들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크다. 압도적 다수의 의석수를 앞세워 수틀리면 특검 카드를 내미는 민주당이지만 3김 여사 특검은 남는 장사가 못될 테니 순순히 동조할 리 없다. 하지만 정치는 생물이라지 않던가. 하물며 롤러코스터 같은 한국정치판이다. 어느 순간 여야 전격 합의로 3김 여사가 줄줄이 포토라인에 서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국격은 일정 부분 손상되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이 비바람이 그쳤으면 하는 게 국민들 바람이 아닐까 싶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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