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월은 라일락 꽃향기로 시작하더니 5월은 아카시 향기로 시작되어 온갖 꽃들이 경쟁하듯 만발해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장미꽃이다. 오늘 아침 신정산은 밤꽃 향기로 가득했다.
불가에 잡화엄식(雜華嚴飾)이란 말이 있다.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인데, 불법의 광대무변함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면서 동시에 온갖 분별과 대립이 극복된 이상적인 세계를 표상하는 말로 전하고 있다. 크고 화려한 꽃들만이 아니라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자잘한 잡초, 잡스러운 꽃 하나하나 모여 마침내 장엄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고 하는 의미다.
어떤 목적 달성이나 결과물을 꽃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긴 하지만 꽃을 피우는 풀이나 나무 입장에서 보면 꽃은 아직 봄인 것이다. 앞으로 여름을 맞아 성장하고 가을에는 풍성한 결실을 맺고 또 긴 겨울도 맞이해야 하는 한 생애의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꽃이 주는 힘은 강하고 자극적이다. 원래 출발은 요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매년 4월에는 수유리 4·19 민주화 묘역을, 5월에는 5·18 민주화 묘역을, 6월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현충원을 순례하듯 국가적 기념일을 지키고 있다. 이 묘역의 공통점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즉 인민 다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을 정중하게 모시면서 살아남은 자들이 이분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고 그 정신과 삶과 뜻을 본받겠다고 다짐하는 곳이다.
생동하는 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쩌면 삶보다는 죽음을 먼저 생각하고,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 추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사가 녹록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꽃이 주는 매력과 매혹적인 향기가 없다면 집단적 우울한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사실 다수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철저히 공리주의적 사고다. 공리주의는 인간을 언제나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고 불행을 물리치기 위해 몸부림치는 본성을 지닌 존재로 보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 실현되려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 희생자 중에 내가 포함되지 않길 바라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위인, 영웅, 지사라 칭하며 어릴 적부터 윤리와 도덕 교육을 통해 사회를 위해 사는 영웅적 삶을 찬양하며 개인의 자발적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생이란 한자의 ‘犧’는 나를 대신하여 소나 양을 제물로 바치는 의미다. 사람들의 의식이 낮은 단계에 있었던 과거 시대에는 다수의 안녕을 하늘에 빌기 위해 동물이나 곡식을 제물로 바쳤다. 어느 한때는 그 제물이 사람이 되는 인신공양을 한 적도 있었다.
시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사회로 발전해 왔다고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사 결정 과정은 결국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이 공리주의 원칙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은 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지배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신관과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합리주의와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새로운 지적체계가 현대를 이끌고 있다. 인간이 과거 전통과 종교적 권위에 따라 인간행동을 판단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행동 속에 내재되어 있는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한 것은 근대 이후였으며 우리 역사로 보면 아주 최근의 변화다.
민주주의와 대중 여론
대개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찾고 있다. 당시는 모든 ‘시민’이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 정치가 시행되었지만 시민의 범주는 18세 이상의 남성이며, 부모가 모두 아테네 출신이어야 했다. 물론 여성, 노예, 외국인 등에게는 정치 참여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형태는 범위와 내용의 차이가 조금씩 있긴 하지만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형태의 정치구조는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화백제도도 그 한 예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인구도 늘어나고 생활형태도 복잡하고 다양해져 현대 민주주의는 대표를 통해 운영되며,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여 정책을 결정한다.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정치적 협약을 통해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실험과 시도를 지금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앞으로 민주주의는 지배의 주체와 지배 방식, 그리고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영역의 공정성이 어떻게 보전되고 유지될지에 대해서는 계속 탐구해야 할 내용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여론이다. 대의제 정치에서는 대중의 의견(public opinion)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반영해 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문제는 이 여론이란 것이 파악하기도 힘들거니와 조작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흔히 여론은 각종 의견 중에서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인정되는 의견을 말한다. 여론은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된 과제로서 그 사회가 해결해야 할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 발생되고 형성된다고 한다. 이러한 여론은 동양에서도 오래전부터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여 아무리 왕정이라 하더라도 민심을 거스를 수는 없다며 여론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근대적 의미의 여론은 장 자크 루소에 의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general will)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개인의 의견을 단순히 합의한 것이 아니라 집합적 수준에서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반영하는 시민의 태도와 가치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초월해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여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개인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화롭게 조정하기 위해 찾은 해결책이 바로 다수에 의한 지배, 즉 다수결 원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론은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모아 놓은 것이 된다.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여론이 중요하지 않지만 평등한 사회가 될수록 여론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지식 수단을 가진 상황에서 진리는 다수 편에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교육이나 소득수준이 다르더라도 모두가 대중매체를 통해 정치 뉴스를 접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의견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수의 의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는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적 선거제도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대표를 뽑는다.
하지만 여론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제기되는 문제가 ‘공중의 자질’이다. 계몽사상가들이 근대적 여론 개념을 제시한 이후 여론은 민주주의 이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공중은 합리적인 존재로 간주됐다. 그러나 플라톤 이후에도 공중의 자질에 대한 회의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공중의 자질을 의심하게 되면 대안은 엘리트가 될 수밖에 없는데, 플라톤도 이런 이유로 민의에 의한 지배보다 철인의 통치를 선호했던 것이다.
20세기에 공중의 자질에 회의적이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이다. 그는 공중에게서 지적인 의견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봤다. 그 이유는 공중이 어리석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에서 요구하는 만큼 일반 시민이 공적 사안에 집중할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정치와 같이 일반 시민이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분야는 언론 보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언론이 제공하는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라 왜곡된 일종의 ‘의사환경(pseudo environment)’일 뿐이다. 그는 고정관념(스테레오타입)을 만드는 곳도 다름 아닌 언론이라 보았다.
그러나 여론은 정치 과정에서 시민들의 요구를 국가와 정부에 연결해 주는 정당, 각종 시민단체, 그리고 소셜네트워크의 발달과 더불어 등장한 1인 미디어 시대로 참여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현실적 관심과 맞물리면서 정책 결정과 의사 결정에 여론이 미치는 영향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물론 이런 과학기술적 발전은 소셜미디어의 통제에 의한 여론 조작과 선거 조작으로 여론을 자의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디지털과 모바일이 대세인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론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 시대의 공론장에 대한 분석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다소 진부할 수도 있지만 잡화엄식(雜華嚴飾)과 같이 다양한 꽃들로 불법을 장식하듯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엮어내려는 노력이 민주주의의 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상옥 교수의 <울림과 떨림>이라는 책을 보면 이 우주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탄소화합물이 특별하긴 한데 이 탄소화합물의 화학반응이 생명체라고 한다. 우주도 생명체도 원자들의 일상적인 결합과 분열이라는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의미 없이 돌고 있을 뿐이다. 진화에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의 상상물의 산물이다.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물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고 했다. 기왕이면 더 큰 꿈, 비전을 가지고 살면 좋겠다. 홍익인간, 이보다 더 큰 꿈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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