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심쿵’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의 줄임말이다. 주로 충격적일 만큼 좋은 대상을 만났을 때 쓴다. 나는 벨기에 브뤼셀의 광장 ‘그랑 플라스(La Grand Place)’에 들어섰을 때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그 단어가 갖는 놀람과 떨림의 정도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브뤼셀 투어를 하는 날, 나는 가이드 깃발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걷는 중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느긋하게 주변 경관을 감상하려는 태도는 단체여행에서 불가능하다. 목적지까지 신속하게 이동할 것, 그 목적지에서는 핵심만 골라 재빨리 보고 필요하면 얼른 기념사진을 찍을 것, 단체여행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랑 플라스로 향하는 그 길에 무엇이 있었는가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그랑 플라스가 내 앞에 ‘짠~’ 하며 나타났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렇다, 정말로 그랑 플라스는 내 눈앞에 기습적으로 나타났다.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내 심장을 강하게 후려치면서.
‘아아, 세상에! 세상에, 이런 광장이 있다니….’
나는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간이 내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담한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고풍스럽고 귀태가 흐르는지, 보면서도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빅토르 위고가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깝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말하는 건데….
그랑 플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꼽자면, 아무래도 길드 하우스가 아닐까 한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보면 볼수록 참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길드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세 이후에 나타난 상인과 수공업자 동업 조합이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외부로부터 부당한 압력이나 착취를 받지 않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길드는 업종별로 다양하게 존재했는데, 예컨대 제빵사의 길드, 정육업자의 길드, 비단 상인의 길드 등과 같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똘똘 뭉친 공동체였다. 그러다 보니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대로 생산이나 판매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반대로 길드 구성원은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정치적 세력까지 얻어 도시의 실권자로 자랄 수 있었다.
바로 그 길드 사무실이 그랑 플라스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당당히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당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 학창 시절 세계사 책에서 배웠던 내용을 한 번 더 곱씹어 보게 되었다. 여행을 하며 그런 기회를 만날 때 맘이 뿌듯하다.
‘백조의 집’에서도 그런 걸 느꼈다. 그랑 플라스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 중에서 입구에 백조 조각이 있는 집이다. 이곳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문’을 썼다고 하여 유명하다. 그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동자가 힘을 합쳐 혁명을 일으켜 자본가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그렇게 사회주의를 채택했던 나라들이 ‘공평하게 잘 사는 나라’가 아닌, ‘공평하게 못 사는 나라’가 되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래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백조의 집을 보고 있자니 중요한 역사 현장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겨울철에 갔기 때문에 그랑 플라스가 거대한 꽃무늬 양탄자로 변하는 기적은 볼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장면을 볼 수 있었다면 나의 감탄사는 어느 정도로 커졌을까?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여행은 이렇게 아쉬움을 조금 남겨놓고 와야 다시 가고 싶다는 열망을 잃지 않는다. 브뤼셀은 내게 그런 도시가 되었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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