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가꾸기나 농사와 같이 식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면 1년 내내 바쁘지만, 그중에서도 5월은 정말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시절이다. 몇 년 전부터 정원과 텃밭을 가꾸겠다는 꿈을 가지고 시골집에 드나들며 나만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가꿔보려는 중인데, 역시 욕심이 과했다고 생각하게 하는 5월이 지나가고 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올해는 더욱더 바빠져서 거의 한 번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고 봄이 모두 지나갔다. 꿈과 현실은 아주 달라 정원의 나무들은 모양이 다듬어지지 않아 제멋대로 크고 있고, 텃밭은 방치되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때까지는 볍씨 뿌리기를 마쳐야 한다는 절기 망종(芒種, 6월 5일)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텃밭에는 아무것도 심지 못하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기억을 되살리게 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난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 오히려 정원을 가꾸고 텃밭을 돌보기에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팬데믹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해야 하는 일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하는 일이 적었고, 많은 만남을 온라인으로 이어갔기에 식물을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대면과 온라인 만남의 차이는 대면을 위해서 이동하는 시간이 추가로 필요한 점이 다른데, 그렇게 짧은 시간이 쌓여서 식물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던 것이 분명하다.
코로나 팬데믹까지 들먹이면서 식물을 돌보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을까 궁리해 본다. 욕심이 과했던 탓인가, 무엇을 포기해야 시간에 여유가 생길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오랜만에 찾은 텃밭을 바라본다. 잡초로 가득 덮인 텃밭 한쪽 편에서 무엇인가 흰빛이 반짝인다. 혹시나 하고 풀숲을 헤쳐 보니 기대하지 못했던 꽃이 피고 어느새 열매도 탐스럽게 맺히고 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니라, 몇 년 전에 한 포기 얻어다가 텃밭 가장자리에 심었던 딸기다. 지난해 이맘때에는 두세 포기로 늘어났던 것을 확인했지만 딸기는 거의 달리지 않아 잊고 지냈던 식물이다. 올해는 더욱이 텃밭을 거의 돌보지 못했기에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었다.
주인은 그의 존재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딸기는 수많은 잡초와 어렵게 경쟁하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풀밭을 헤쳐 보니 여기저기에 포기가 흩어져서 자라고 있다. 그새 이렇게 번식도 많이 했으니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제법 딸기 맛을 볼 수 있었겠다 싶다. 반성과 아쉬운 마음으로 빨갛게 익은 딸기를 몇 개 따서 입에 넣어본다. 이렇게 맛있는 딸기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하고 달다. 겨울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딸기 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사실 딸기의 생육 절기는 봄부터 가을까지가 정상이다. 그러니까, 딸기가 야외에서 자라면 봄에 싹이 나고 꽃을 피우며 여름까지 열매를 달다가 가을에 잎을 떨구고 휴면에 들어간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주로 겨울철에 딸기를 먹는다. 그 이유는 농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작물의 수확시기를 앞당겨서 재배하는 촉성재배(促成栽培)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작물을 온실 ·온상 등을 사용하여 가온(加溫)·보온(保溫)하여 재배하는 방법인데, 수확시기를 앞당김으로써 시장에서의 경제성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딸기도 이 방법이 대세를 차지하다 보니, 마치 겨울이 제철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겨울에 먹던 딸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싱싱하고 오묘한 맛을 보고 나서 무엇에 홀린 듯 딸기 포기 옆의 잡초를 맨손으로 모두 뽑아주었다. 잡초를 뽑는 손이 흙빛으로 잔뜩 물들고 손톱 밑에도 까맣게 흙이 끼었다. 그러면서, 딸기가 주인의 얄팍함을 비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민망한 웃음이 난다.
무시당하고 소외된 속에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왔던 텃밭의 딸기를 보면서 우리 삶을 생각해 본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나를 알아봐 주지 않음을 탓해본 적은 없었는가. 부모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부를 게을리하고, 직장 상사가 나의 능력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일에 태만하지는 않았는가. 언젠가 읽었던 중국의 시인 이백(李白)의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를 내셨으니 반드시 어딘가 쓸모가 있다’는 시구가 떠오르기도 한다. 누가 알아봐 주지 않고 인정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으면 잡초 속의 딸기처럼 언젠가는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줄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이렇게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소중한 딸기를 잡초 속에 방치한 주인처럼, 빨갛게 익은 딸기를 맛보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고 주변의 잡초를 뽑아주는 정도로 때가 늦어지면 어떻게 될까. 미리 그 가치를 알아차려 보호해 주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곧 임기를 시작하는 22대 국회의원 중에 초선 비율이 44%라는 통계를 신문에서 보았다.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55%가 초선이었던 것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수치이다. 국회의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부 주요 인사나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비율이 점차 줄어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하거나 중견 또는 원로 정치인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 점점 소홀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회사도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비율보다 즉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 사원 위주로 채용 형태가 바뀌고 있는 점도 비슷한 일이다. 모든 면에서 혹시 우리 사회가 ‘게으른 딸기 주인’처럼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변화의 속도가 빠른 지금, 수많은 사람 속에서 특정 분야에 쏠리지 않고 각각의 능력과 가치를 알아차리고 발굴해 사회의 인재로 키워가는 시스템이 필요한 시대이다. <다음 글은 6월 13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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