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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 역사 SK의 ‘백전 노장’ 정유 공장이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업무에 한창일 이른 오후 공장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안전 점검용 로봇개 한 마리가 분주히 돌아다닐 뿐이다. 특이점은 이뿐이 아니다. 한 직원이 텅 빈 공장 부지를 태블릿 카메라에 담자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 가상 설비가 화면에 나타나고, 공장 환경이 그대로 재현된 가상현실 속에서 위험 작업을 선행해 보기도 한다.
‘CLX는 한국 에너지의 심장’이라고 한 최태원 회장의 발언처럼 우리나라 석유화학 사업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SK이노베이션 생산기지의 변신을 확인하고자 SK 울산 CLX를 지난 23일 방문했다.
공장에 들어서자 눈을 사로잡은 건 땅속부터 지상 10여 미터 높이까지 굽이굽이 얽혀있는 파이프라인들과 거대한 탱크들이었다. 일렬로 나열하면 울산에서부터 달을 왕복할 수 있다는 거대한 설비 안에는, 심장을 뛰게 하는 혈액처럼 여러 종류의 정유·석유화학 제품들이 흐르고 있었다. 공장에선 휘발유·등유·열분해유 등 수 많은 제품을 취급하지만 정작 방문객들은 기름 한 방울 만져볼 수 없다. 일반 제조업 공장과 달리 모든 제품이 설비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SK이노베이션이 지난 2016년부터 ‘스마트 플랜트’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전송(DT)기술을 적용해 생산 안전성과 정확도를 높인 것이다.
현재 전 공정에는 자동 제어(APC)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직원들은 대부분 조정실에서 근무하며 자동화된 설비들을 원격 조종한다. AI를 도입하면서 제어 수준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가령 제품의 온도를 조절하는 ‘열교환기’는 부품을 직접 꺼내보지 않아도 전문 프로그램을 통해 노후 정도를 파악해 교체할 수 있다. 또 하루 두 번 제품을 직접 분석하는 데 그치던 품질관리는 실시간 예측 시스템으로 더욱 철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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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기술의 적극적인 활용도 눈에 띈다. 실제 작업에 앞서 가상으로 설비를 설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전 공장에서 사용 가능하다. 용도에 따라 설비의 높이·규모를 조절해 가며 최적의 형태를 찾을 수 있으며 비용 예측이 가능해 효율적이다.
스마트플랜트는 무엇보다 안전 관리에서 빛을 발한다. 한 직원이 작업자의 몸에 부착하는 센서에 날숨을 불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다고 경고한다. 김윤중 SK에너지 스마트플랜트 추진팀 PM은 “이 정보는 조정에 곧장 알려진다”며 “긴급상황을 인지하고 즉시 조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위험 작업을 하기 전 가상현실에서 선행 학습을 한 뒤 실제 작업에 투입된다”며 “보다 빠르게 안전한 작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스마트플랜트는 2.0’ 체제를 선언하며 도약을 시작했다. 제2 FCC(원유를 정제하고 남은 기름을 다시 한 번 정제하는 공정)공장에 처음 투입된 로봇개가 대표적이다. 현대차그룹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개 ‘스팟’이다. 가스감지기·열화상 카메라 등 각종 장치가 부착된 이 로봇개는 공장 내 안전점검을 실행하며, 추후 전 공정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CLX 내 90여 명의 데이터분석 전문가(CDS) 및 10여 명의 AI전문가를 양성해 직접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정창훈 SK에너지 스마트플랜트 추진 팀장은 사업화에 대한 구상도 조심스레 밝혔다. 정 팀장은 “과거 전문업체의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산업의 특성이 잘 반영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면서 “SK이노베이션이 직접 개발해 정유·석화 산업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외부에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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