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채권형 랩어카운트(랩)·특정금전신탁(신탁) 계좌를 돌려막다가 적발된 증권사들의 징계 절차가 시작됐으나 금융감독원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연루된 증권사들의 입장을 듣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데다가 합의되지 않은 쟁점이 있어서다.
일부 증권사의 제재 수위가 정해지면 이를 표본으로 다른 증권사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될 예정이다. 금융당국은 랩·신탁 제재에 착수하는 데 오래 걸렸을 뿐 진행은 빠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24일 금융당국 등에 따르면 금감원은 지난 21일 KB증권과 하나증권에 대한 제재심의위원회를 열었으나 제재 수위를 정하지 못한 채 두 증권사의 의견만 듣고 종료했다. 금감원은 추가 제재심을 개최하거나 증권사로부터 서면 자료를 제출받아 징계 수위를 정할 방침이다.
랩·신탁 돌려막기는 두 증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업계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랩·신탁은 증권사가 알아서 고객의 계좌를 운용하는 상품으로 통상 3~6개월의 단기 상품이라 수익률이 높지 않다. 증권사는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랩·신탁의 만기보다 더 긴 채권을 담았는데, 2022년 레고랜드 채무 불이행 사태가 터지면서 말썽이 생겼다.
채권을 내놔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자 증권사들은 랩·신탁 만기 고객의 자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여러 증권사는 만기가 도래한 고객의 채권을 다음 고객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수익률을 돌려막았다.
금감원은 지난해 5월부터 KB증권과 하나증권을 포함해 NH투자증권, SK증권, 교보증권, 미래에셋증권, 유진투자증권, 키움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9개 회사를 검사했는데 모든 증권사에서 크고 작은 비위 행위가 발견됐다. 한 증권사는 6000번의 거래를 통해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 전가하기도 했다.
KB증권과 하나증권이 먼저 제재심에 오른 이유는 이들 증권사에 대한 검사가 먼저 시작돼서다. 이후 다른 증권사도 차례로 제재심에 회부될 예정이다.
KB증권과 하나증권은 제재심에서 ‘고객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랩·신탁 만기를 맞은 A고객 계좌에 담긴 채권을 B고객 계좌를 통해 일부러 비싸게 받아준 이유가 증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징계를 감경받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되는데, 이같은 논리를 금감원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B고객처럼 돌려막기로 피해를 본 투자자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재심에서 단번에 결과가 나지 않으면서 애가 타는 건 랩·신탁 투자자다. 대다수의 증권사가 금융당국의 징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배상하면 배임으로 걸릴 수 있다며 배상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서다. 하지만 이 또한 핑계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기관 검사 및 제재에 관한 시행세칙에 따르면 감독기관이 문제를 인지하기 전에 스스로 시정한 자는 제재를 감경 또는 면제받을 수 있어서다. 이미 NH투자증권과 SK증권은 투자자들에게 배상을 마쳤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계 관계자는 “선배상을 하면 책임을 자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며 “증권사들이 전략적 측면에서 배임을 언급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KB증권과 하나증권에 대한 제재심 결과가 나오면 다른 증권사에 대한 제재 수위도 빠르게 결론이 날 전망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문제가 된 증권사 간 공통 쟁점이 있다”며 “이 부분이 KB증권과 하나증권의 제재심에서 정리되면 나머지 건은 효율적으로 처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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